13장. 평범한 손미나

미나의 노트

by 꼬르륵

준수와 만나기로 한 편의점 앞 벤치에 앉아서 미나와 채린은 기다렸다. 6시 50분. 아직 준수는 보이지 않았다.

"안 오면 어떡해?"

미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직접 찾아가야지."

채린도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6시 55분. 여전히 준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나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준수가 노트를 갖고 도망간 건 아닐까. 아니면 이미 다른 소원을 쓴 건 아닐까. 온갖 불안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갔다.

7시 정각. 편의점 앞 시계가 7시를 가리켰다. 미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채린도 초조하게 거리를 살폈다.

"미나야..."

채린이 미나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수였다.

가방을 메고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준수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미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채린도 함께 일어났다.

준수가 두 사람 앞에 멈춰 섰다. 숨을 고르던 준수가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노란 노트를 꺼냈다.

"미안. 늦었어."

준수가 노트를 내밀며 말했다. 그의 눈가가 조금 붉어 보였다.

"많이 고민했어. 정말 많이. 근데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이건... 진짜가 아니니까."

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오늘 오후에 엄마한테 전화했어.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준수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 소리 듣고 생각했어. 엄마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항상 버텨주셨어. 노트 없이도 나아지실 수 있어. 아니, 노트 없이 나아지시는 게 진짜야."

준수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빠 일도. 나 노트에 아빠 일이 바로잡히길 바란다고도 썼거든. 아빠가 내부 고발을 하셨는데 회사에서 억울하게 잘리셨잖아. 그게 너무 화가 나서..."

준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근데 생각해 봤어. 아빠는 진실을 말하셨어. 올바른 일을 하신 거야. 그런데 내가 노트 같은 거짓의 힘을 빌려서 그걸 바로잡으려고 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거짓을 이기겠다고 거짓의 힘을 빌릴 순 없잖아."

준수가 미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아빠가 항상 그러셨어. 진실은 언젠가 반드시 밝혀진다고. 시간이 걸려도 결국 진실이 거짓을 이긴다고. 나도 그렇게 믿고 싶어. 노트 같은 거 없이도."

미나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채린도 눈물을 글썽였다.

"고마워. 준수야."

미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나야말로 고마워. 네가...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줘서."

준수가 작게 미소 지었다.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편의점 불빛 아래 서 있는 세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돼?"

준수가 물었다.

"불태워야 해. 우리 함께."

미나가 노트를 받아 들며 대답했다.

"어디서?"

"저쪽이야."

미나와 채린이 말했다. 세 사람은 함께 그 골목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거리에 가로등 불이 하나둘 켜졌다.

세 사람은 그 골목으로 향했다. 오늘 아침 할머니를 만났던 그곳. 어둠이 내린 골목은 고요했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길을 비췄다.

"여기가 맞지?"

채린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응. 여기야."

미나가 대답했다. 아침에는 분명 이곳에 할머니의 구멍가게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골목길일 뿐이었다.

"여기서 태우면 되겠다."

준수가 말했다. 미나는 노란 노트를 꺼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노트를 바라봤다. 이 노트에 썼던 모든 소원들. 전교 1등, 예쁜 외모, 아버지의 승진, 그리고 최수빈이 사라지길 바랐던 무서운 소원까지. 그 모든 것이 이제 사라질 것이다.

"정말 괜찮아?"

준수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응. 괜찮아."

미나가 환하게 웃었다.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두렵기보다는 후련했다.

"어차피 진짜 내 거였던 적이 없었으니까."

채린이 가방에서 성냥을 꺼냈다. 아빠 책상 서랍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준비됐어?"

미나와 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나는 노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세 사람은 노트를 둘러싸고 앉았다. 채린이 떨리는 손으로 성냥을 그었다.

"치익-"

성냥에 불이 붙었다. 작은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채린이 조심스럽게 노트 모서리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천천히 노트를 타고 올라갔다. 노란 표지가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페이지들이 하나둘 오그라들었다. 미나가 썼던 글씨들이 검게 변하며 사라져 갔다.

'전교 1등이 되고 싶어.'

그 글씨가 불타 사라졌다.

'예뻐지고 싶어.'

그 글씨도 재가 되어 사라졌다.

'최수빈이 사라졌으면.'

가장 무서웠던 그 소원마저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준수가 쓴 글씨들도 함께 타올랐다. 엄마의 건강, 아버지의 억울함. 모든 소원이 연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세 사람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봤다. 바람이 불어와 연기를 흩어놓았다. 불꽃이 점점 커지면서 노트 전체를 삼켰다.


그때였다.

"호호호..."

어디선가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깜짝 놀라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희미하게 무언가가 보였다. 할머니의 구멍가게였다. 아니, 가게 같은 것이었다. 마치 신기루처럼, 아니면 오래된 사진처럼 흐릿하게 떠오른 가게의 모습. 그 앞에 할머니가 서 있었다. 미소를 띤 채로.

"잘했다, 아가들."

할머니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멀리서 들리는 것 같으면서도 또렷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선택을 한 아이들을 만났구나."

할머니가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나도 이제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됐어. 그동안 너희 같은 아이들을 만나지 못해서 묶여있었는데. 너희는 행복할 거야. 진짜 행복을."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미나와 채린, 준수도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가게도 함께. 마치 물에 번지는 수채화처럼, 윤곽이 흐릿해지고 색이 옅어졌다. 그리고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높은 담벼락이 서 있었다.

"어...?"

채린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담벼락으로 다가가 손으로 만져봤다.

"이게 뭐야...?"

분명히 실재하는 벽이었다. 차갑고 단단한 시멘트 벽. 이끼가 군데군데 끼어있고, 오래되어 보이는 벽.

"아까... 분명 여기 골목이 있었는데..."

준수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벽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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