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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Aug 24. 2021

나의 전사(warrior), 친정 엄마의 판단

경상도 시어머니와 서울 며느리의 공동육아기록

내가 볼 때 우리 부모님은 공부는 잘 못하셨던 것 같다. 죄송스럽지만 그건 우리 부모님도 인정하실 것이다. 내가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과제를 내줬는데 도저히 풀 수가 없어서 아빠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아빠는 나에게 슈퍼맨이었다. 마당에는 아빠가 드는 역기, 복싱 샌드백이 있었고, 일본산 오토바이와 트랙터가 있었다. 아빠는 못 드는 게 없었고, 아빠가 트랙터를 몰고 지나가면 돌무더기 밭도 고른 땅으로 변해있었다. 아빠가 반짝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면 고등학교 오빠들도 쳐다봤다. 그런데 내가 내민 초등학교 수학 문제집 앞에서 아빠는 당황한 듯 말씀하셨다.  

"수학은 나한테 물어보지 마라"

못한다고는 안 하셨지만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엄마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엄마가 초등학교 어머니회 회장이었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엄마에게 전해달라고 봉투를 주셨다. 그 봉투에는 엄마가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시집오면서 겪은 일중에서 소개할 만한 이야기를 써달라는 메모와 종이가 있었다. 학교에서 소식지 같은 것을 만드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다 썼냐는 내 질문에 엄마는 분명 다 써서 담임선생님께 드렸다고 했다. 그런데 며칠 뒤 급식실에서 밥을 받으려고 서 계시던 선생님께서 바로 뒤 나를 보시고는 아차 싶은 목소리로

"참, 어머님은 아직 글 안 쓰셨다니?"

하시는 것이다. 나는 놀라

"엄마가 써서 드렸다고 했는데요"

했다. 그러자 담임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소식지에 실린 엄마의 글을 보고 나는 알았다. 엄마가 쓴 게 아니라는 것을. 내가 엄마에게 진짜 엄마가 쓴 거냐고 묻자 엄마는 그랬다. 엄마가 전화로 선생님께 말한 대로 선생님이 쓰신 거라고. 진짜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우리 엄마가 글짓기에 자신 없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간이 지나 내가 풀 수 있는 수학 문제가 많아지고, 글짓기 대회에 나가서 종종 상도 받으면서 묘한 자신감을 갖게 됐다. 아빠, 엄마가 하지 못하는 걸 내가 한다는 건 부모님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게 했다. 그런 걸 어른들 말로는 '머리 좀 굵었다고 말 안 듣는다'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더욱이 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아버지가 편찮으셨고, 나는 힘든 엄마에게 '알아서 할게, 걱정 마'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대학 전공도 휴학도, 유학도 부모님과 상의는 없었다. 그렇게 제 잘난 맛에 살던 어느 날 엄마를 다시 보게 된 사건이 생겼다.


그 해 나는 머물던 기숙사를 나와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넉넉지 않은 엄마의 사정을 알기에 저렴한 원룸을 알아보던 차에 보증금 100만원에 월10만원이라는 신박한 가격의 원룸 광고를 보았다. 도대체 어떤 원룸인가 궁금하기도 해서 찾아갔더니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맞았다. 3층 건물에 1층은 가게가 있었고, 2층은 할머니가 사시는 가정집, 3층은 여러 개의 방이 복도식으로 되어있어 나같은 학생들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건물주였던  할머니는 할머니가 사는 2층 가정집 안에 남는 방을 보증금 200에 월세 10만으로 내놓았다고 보여주셨다. 깔끔했다. '주인 할머니와 거실, 부엌, 화장실을 공유하는 방이라...'

걱정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싼 맛에(?) 덜컥 계약을 했다.


처음엔 자취생활이 외롭지 않아서 좋았다. 내가 자란 시골의 할머니들을 대하듯 종종 무거운 것도 옮겨드리고, 안 보이는 글자도 봐드렸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할머니는 내가 들어가면 장 볼 것을 적은 종이를 주셨다. 할머니 말씀이신즉, 다리가 아파 장을 볼 수가 없는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또 할머니는 내가 화장실을 쓰거나 그릇 씻는 소리가 나면 어느새 나와 거실 소파에 앉아 나를 보고 계셨다. 뒤통수가 뜨거웠지만 누구와 살더라도 고충은 있기에 참았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내가 아는 학생이 지금 네가 사는 방을 보증금 300에 월 15만 원을 준다고 하는데 네가 저 위 옥탑방으로 옮기면 어떨까?"

"...?"

당황스러웠다. 나는 이미 그 가격에 1년 계약을 한 상황이었다. 갑자기 나보고 옥탑방으로 가라니. 그동안 도와드린 부분도 많기에 배신감마저 들었다. 다음날 나는 그건 어렵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할머니는 내가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가는 순간까지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하셨다. 욕실을 나서면 욕실 바닥에 물을 뿌리고 치우라고, 부엌을 쓰고 나서면 그릇을 소리가 나지 않게 놓으라며 언짢아하셨다.


나는 결국 언니에게 도움을 구했다.  서울에 올라온 언니는 내가 할머니와 살 수 없다고 판단하고 주인 할머니에게 방을 빼겠다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 보증금을 줄 수 없다고 버티시는 게 아닌가. 보증금 100만 원을 주지 않겠다고 매서운 눈으로 보는 나이 든 할머니. 나와 언니는 충격을 받았다.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별말 없이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밤에 도착한 엄마가 나의 자취방에서 함께 잔 다음날 아침, 할머니가 바깥에서 나를 부르시는 소리가 났다.

"꼬르륵이 너 나와봐라"

단단히 독이 오른 목소리였다. 할머니는 간밤에 우리 엄마가 왔다는 걸 모르고 계셨다. 내가 나가자 엄마가 뒤따라 나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 꼬르륵이 엄마예요"

엄마의 목소리가 발톱을 숨겨놓은 듯 서늘했다. 할머니는 엄마의 등장에 당황했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이야기 다 들었노라고. 그래도 보증금은 주셔야 되지 않겠느냐고. 대충 그렇게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러자 할머니는 엄마의 차분한 기세에 눌려 생각을 해보겠노라고 하셨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잠시 늦은 아침을 먹으러 나왔다.


그런데 엄마의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 어떤 여자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전화기 너머 엄마에게 너라고 소리치는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엄마는 당황한 기색 없이


"뭐 이 x야! 너 와! 와서 얘기해"


하고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할머니의 딸이었던 것이다. 나는 엄마가 그렇게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처음 들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고상하게 보이려고 꽤나 신경을 쓰던 엄마였다. 전화를 끊은 엄마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야무지게 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그 집에 들어갔다. 거실에는 할머니의 딸이 와있었다. 약이 오른 그 여자가 엄마를 향해 아까 뭐라고 했느냐고 서늘하게 물었다. 그러자 엄마,


"와? 내가 못할 말 했나?"


하며 그 여자 앞에 바짝 들이대는 것이 아닌가. 엄마의 눈밑이 파르르 떨렸다. 그때 나는 엄마가 적진에 맹렬하게 뛰어드는 전사 같았다. 내 자식 건드리면 물안 가리 전사. 여차하면 칠 기세로 엄마가 다가서자 그 여자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뒤 엄마는 보증금을 안 주면 우리 꼬르륵이는 내려보내고 내가 여기서 살겠다고, 그런데 우리 남편이 몸이 안 좋아서 내가 옆에 있어야 하니 남편도 같이 지내겠다며 한술 더 떠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당신 준비하고 있으라고. 오늘 서울로 올라와야 된다고 아빠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마가 소란을 떠는 중에 통화를 듣고 있던 딸이 주인 할머니와 뭐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엄마가 전화를 끊자 딸은 엄마에게 조용히 말했다. 보증금 드릴 테니 나가주시죠.



'엄마가 이겼다'



나는 놀랐다. 그때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 공부만 하던 내가 헛똑똑이였음을, 세상을 너무 순진하게 봤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엄마가 나보다 글짓기는 못하지만 사람은 제대로 다루는 것을, 때로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은 엄마처럼 상대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후 나는 엄마가 내게 조언을 하거나 직언을 하면 납작 엎드려 듣게 됐다. 엄마는 인생의 똥밭을 굴러 본, 실전에 강한 사람이니까.


그리고 그런 엄마가 친정으로 도망 온 내게 말했다. 둘째를 시어머니에게 맡기라고. 젖먹이랑 돌잡이 아 둘이 붙어있으면 어른 둘이 있어도 감당 안 된다고. 어른이 힘들면 애들도 힘들다고. 느거 어머니도 그게 낫다고.


토요일을 맞아 남편이 첫째를 데리고 처갓집에 내려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엄마가 내린 판단이었다. 그리고 그게 내가 서울에서 도망쳤지만 끝까지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나도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엄마의 목소리로 듣는 기분이었다랄까.  


그렇게 나는 나의 전사(warrior), 엄마의 말대로 젖먹이 둘째를 안고 시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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