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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Aug 26. 2021

어머님, 제 아를 맡깁니다.

경상도 시어머니와 서울 며느리의 공동육아기록

내가 남편과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님과 안부전화를 나누는데 어머님께서 통화 말미에 그러셨다.

"그래~사랑해"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나는 아직 어머님이 어려웠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 끝에 나온 말은

"네, 감사합니다"

였다. 나를 사랑하신다니.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서로가 좋은 기억과 추억을 나누고 이제 신뢰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후로도 당황스러워하는 나의 대답을 어머님은 아쉽지만 이해하신다는 듯 몇 차례 넘어가시다 하루는

"야~니는 나 안 사랑하나?

하셨다. 당황스러워하다 결국 얼결에 대답했다.

"네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머님을 사랑한다. 내게 그 말은 어머님의 삶을 존중하고, 어머님의 입장을 이해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어머님은 어머님께서 초등학생이었을 때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일찍 고아가 된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이 있다.


"엄마, 아빠 없는 아도 아니고..."


내가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첫째의 유아 세례식이 있자 어머님은 세례 받는 걸 미루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엄마 없는 아도 아니고 엄마가 안 가고 할머니랑 있으면 서글프다고. 둘째의 배넷머리를 한 번 밀어줘야겠다는 말이 나왔을 때도 그 말을 하셨다.

"그럼 며느리가 데려가서 밀어야지. 할머니가 데려가면 엄마 없는 아로 알아요"

요즘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보는 손자, 손녀가 많아서 꼭 그렇게 보진 않는다고 말씀드리려다가 알았다. 어머님은 자라는 동안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이 안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자는 엄마, 아빠 없는 아라서 언니가 와있다'라고 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머님은 행여 엄마, 아빠 없이 커서 그렇다고 할까 봐 더 밝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셨다고 한다. 한 번은 친정에서 전화드린 내게 그러셨다.


"니는 그래도 힘들면 갈 친정이 있어서 좋겠다...내는 갈 데도 없었어요."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한 번씩 속상해도 출가한 언니들 집에 갈 수도 없고 더 서러우셨다고 한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속이 답답해서 병원을 갔는데 속이 화병으로 다 닳으셨다고. 그 길로 집에 와 시부모님께 우시면서 내는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겠노라고. 내 속이 다 헐었다고 설움을 토했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식구라고 해서 다 같이 모여있는데 내만 가족이 아닌 것 같고... 나만 없으면 가족이 평화로운 건가 싶기도 하고... 나도 그래 외로웠는데 며느리 니도 그랬나. 내가 신경 쓴다고 해서 썼는데 미안하다..."


어느날 남편과 다투고 대화가 되지 않아 어머님께 하소연하자 어머님 하신 말씀이었다. 어머님께도 서운한 게 있었다. 나는 남편이 잘못한 부분을 아시고도 훈계를 해 주시지 않아 편들어주시는 건가 답답했었노라고. 그러고 가족끼리 다 같이 놀러 가거나 맛있는 걸 먹을 때면 억지로 끼어있는 그 자리가 너무 힘들고 외로웠었노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님은, 


"내가 살아보니까 우리 둘이 싸우는 것보다 누가 우리 보고 뭐라고 하는 것 때문에 더 싸우더라. 나는 니들이 우리가 하는 말 때문에 더 싸울까 봐 조심스러버요. 그리고 왜 암말도 안 하겠나. 내가 너 안 보는데서 해요.

나도 다 알아요. 나도 그렇게 살아봐서 신경 쓴다고 그랬는데 너도 그랬나. 내가 미안타"


그냥 달래려고 하신 말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님의 진심을 느꼈다. 사실 남편만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다 어머님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런데 내게 연신 미안하다고 시는 어머님의 노력에 나는 조용히 나를 돌아봤다.




이제 나는 어머님께서 본능적으로 어머님의 새끼, 남편을 챙길 때 괜히 서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나를 생각하는 어머님의 마음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 내외가 갑작스럽게 시댁에 나타나자 어머님은 두 팔 벌려 반겨주셨다. 첫째는 어린이집을 알아봐야 하니 둘째를 어머님께 맡기고 우리는 며칠 후 올라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어차피 그래 할 거면 바로 그래 하자고 하셨다. 내심 일이 이렇게 되는 게 맞다고 안도하시는 눈치셨다.


그렇게 어머님은 경상도 구미에서, 나는 서울에서, 둘째와 첫째는 돌보를 공동 육아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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