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남편과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님과 안부전화를 나누는데 어머님께서 통화 말미에 그러셨다.
"그래~사랑해"
굉장히 당혹스러웠다. 나는 아직 어머님이 어려웠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 끝에 나온 말은
"네, 감사합니다"
였다. 나를 사랑하신다니. 나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서로가 좋은 기억과 추억을 나누고 이제 신뢰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후로도 당황스러워하는 나의 대답을 어머님은 아쉽지만 이해하신다는 듯 몇 차례 넘어가시다 하루는
"야~니는 나 안 사랑하나?
하셨다. 당황스러워하다 결국 얼결에 대답했다.
"네네.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런데 나는 이제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머님을 사랑한다. 내게 그 말은 어머님의 삶을 존중하고, 어머님의 입장을 이해한다라는 뜻이기도 하다.
어머님은 어머님께서 초등학생이었을 때 부모님 두 분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일찍 고아가 된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이 있다.
"엄마, 아빠 없는 아도 아니고..."
내가 산후조리원에 있을 때 첫째의 유아 세례식이 있자 어머님은 세례 받는 걸 미루는 게 어떠냐고 하셨다. 엄마 없는 아도 아니고 엄마가 안 가고 할머니랑 있으면 서글프다고. 둘째의 배넷머리를 한 번 밀어줘야겠다는 말이 나왔을 때도 그 말을 하셨다.
"그럼 며느리가 데려가서 밀어야지. 할머니가 데려가면 엄마 없는 아로 알아요"
요즘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보는 손자, 손녀가 많아서 꼭 그렇게 보진 않는다고 말씀드리려다가 알았다. 어머님은 자라는 동안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이 안 계셨던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자는 엄마, 아빠 없는 아라서 언니가 와있다'라고 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어머님은 행여 엄마, 아빠 없이 커서 그렇다고 할까 봐 더 밝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셨다고 한다. 한 번은 친정에서 전화드린 내게 그러셨다.
"니는 그래도 힘들면 갈 친정이 있어서 좋겠다...내는 갈 데도 없었어요."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한 번씩 속상해도 출가한 언니들 집에 갈 수도 없고 더 서러우셨다고 한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속이 답답해서 병원을 갔는데 속이 화병으로 다 닳으셨다고. 그 길로 집에 와 시부모님께 우시면서 내는 더 이상 참고 살지 않겠노라고. 내 속이 다 헐었다고 설움을 토했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식구라고 해서 다 같이 모여있는데 내만 가족이 아닌 것 같고... 나만 없으면 가족이 평화로운 건가 싶기도 하고... 나도 그래 외로웠는데 며느리 니도 그랬나. 내가 신경 쓴다고 해서 썼는데 미안하다..."
어느날 남편과 다투고 대화가 되지 않아 어머님께하소연하자 어머님 하신 말씀이었다. 어머님께도 서운한 게 있었다. 나는 남편이 잘못한 부분을 아시고도 훈계를 해 주시지 않아 편들어주시는 건가 답답했었노라고. 그러고 가족끼리 다 같이 놀러 가거나 맛있는 걸 먹을 때면 억지로 끼어있는 그 자리가 너무 힘들고 외로웠었노라고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머님은,
"내가 살아보니까 우리 둘이 싸우는 것보다 누가 우리 보고 뭐라고 하는 것 때문에 더 싸우더라. 나는 니들이 우리가 하는 말 때문에 더 싸울까 봐 조심스러버요. 그리고 왜 암말도 안 하겠나. 내가 너 안 보는데서 해요.
나도 다 알아요. 나도 그렇게 살아봐서 신경 쓴다고 그랬는데 너도 그랬나. 내가 미안타"
그냥 달래려고 하신 말이 아니었다. 나는 어머님의 진심을 느꼈다. 사실 남편만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게 다 어머님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런데 내게 연신 미안하다고 하시는 어머님의 노력에 나는 조용히 나를 돌아봤다.
이제 나는 어머님께서 본능적으로 어머님의 새끼,남편을 챙길 때 괜히 서러워하거나 질투하지 않는다. 나를 생각하는 어머님의 마음도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들 내외가 갑작스럽게 시댁에 나타나자 어머님은 두 팔 벌려 반겨주셨다. 첫째는 어린이집을 알아봐야 하니 둘째를 어머님께 맡기고 우리는 며칠 후 올라가겠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님은 어차피 그래 할 거면 바로 그래 하자고 하셨다. 내심 일이 이렇게 되는 게 맞다고 안도하시는 눈치셨다.
그렇게 어머님은 경상도 구미에서, 나는 서울에서, 둘째와 첫째는 돌보를 공동 육아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