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를 살게 하는 한마디
"부모님이 정말 훌륭하시네"
대한민국에서 스스로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흙수저의 사춘기는 어떨까.
굳이 나누자면 내 생각에 나는 흙수저다.
부모님과 지방에서 함께 살 때까지는 내 출신에 대해 굳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지방에서는 친구들과 나의 형편이 고만고만했기 때문에. 그런데 서울로 대학을 와보니 친구들과 나의 환경이 너무 달랐다.
땡볕에 땀을 흘려야만 돈을 벌 수 있었던 부모님과 달리 내가 다닌 대학에서 만난 친구들의 부모님은 대부분 에어컨이 나오는 곳에서 근무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친구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친구들은 굳이 부모님의 직업을 밝히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내 머릿속 대학 동기들의 부모님 직업은 대체로 선생님, 변호사, 판사, 검사, 대기업 과장, 부장, 중소기업 사장 등이다.
그래서 내게는 '화이트칼라’라는 단어가 고용주가 아닌 노동자를 뜻하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화이트칼라 층이 농업계 종사자보다 신분적으로 높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경험한 부모님의 일은 너무 고돼 보였다.
하교 후, 나는 종종 인삼밭에서 인삼 딸을 따고, 과수원 소독 줄을 잡고, 고추 밭 잡초를 매기도 하고, 배를 땄다. 땡볕에서 그런 일을 하고 나면 ‘너 공부 안 하면 나중에 몸이 고생이다’는 말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 대입 입시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 후, 나에게'대춘기'가 왔다. 입시공부에 뒤로 내팽겨졌던 사춘기가 대학 입학 후 온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상황은 왜 친구들과 다른가?'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고민 속에는 친구들의 부모님과 다른 우리 부모님의 처지도 돋보였다. 특히 그때는 아버지도 몸이 편찮았고, 경제적으로도 집이 힘든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집안 어른들이 벌초한다고 왔는데 이번에 집안사람이 너 다니는 대학 수학 교수가 됐다더라. 한번 가서 인사드려"
엄마는 우리 딸이 그 대학에 다니고 있노라며 자랑을 한껏 한 모양이었다. 엄마가 가라고 하니 가긴 갔으나 당시 나의 소극적인 태도로 직접 만나 뵙지는 못했다. 사실 그렇게까지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어른이 어려웠고, 특히 우리 집 사정을 다 아는 나름 성공한 집안 어른이 부담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미리 연락도 없이 교수님이 안 계신 시간에 사무실을 찾아 음료수와 안부 메모만 남겼다. 그러자 그 교수님께서 내 번호로 전화가 오셨다.
"아니, 얼굴 보고 가지.... 그래, 언니도 있다면서?"
"아, 네. 바쁘신 것 같아서요... 네. 언니는 지금 어디 어디 대학원 다니고 있어요."
" 오, 그래? 그럼 남동생은?"
" 네, 남동생은 어디 어디서 공부 중이에요"
그러자 교수님,
"이야, 부모님이 훌륭하시네. 이렇게 자녀들을 잘 키우시고"
넉넉한 덕담을 건네셨다. 그 후, 언제 한번 밥 먹자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남긴 채 왕복 3시간 거리 공대 교수님과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주말에 집에 내려가자 엄마는 '교수님이 뭐라고 그러시디?' 물었다.
나는 그분께서 이런 것도 묻고 저런 것도 묻고 그러셨다. 그리고 말미에
"이야, 부모님이 훌륭하시네. 자녀들을 이렇게 잘 키우시고"
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러자 그 말를 듣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두 눈이 갑작스레 붉어지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숙이고, 엄마는 몸을 돌려 애써 눈물을 감추시는 것이었다.
'....'
훌륭한 부모님...
출세한 집안 어른의 그 말에 울컥하시는 두 분의 모습을 보며 나는 깨달았다.
'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서 애를 정말 많이 쓰셨구나.
훌륭한 부모라는 그 말에 닿기 위해 부단히 마음 쓰고, 애달프고 하셨구나. 그래서 눈물이 나시는구나'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우리 부모님의 능력이 중요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알게 됐다. 내가 부모님을 사랑한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그렇게 나의 대춘기는 무난하게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