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우리를 키울 때는 금쪽같은 내새끼도 없고, 육아 유튜브도 없었다.
그런데도 엄마가 우릴 키운 방식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우리를 줄곧 대단하게 여겨 주었다.
젊은 시절 엄마가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발랄한 표정으로 한 손을 허리에 얹고,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사진 속 엄마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시골에서 엄마가 주로 몸빼바지만 입은 모습만 보다가 미니스커트를 입은 모습이 낯설었다. 하지만 예쁜 엄마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엄마는 시골에서 보기 드문 흰 피부의 아줌마였다. 동네 다른 아줌마들은 햇볕에서 일하다 보니 검게 그을렸는데 엄마는 유독 피부가 하얬다. 코고 높고 눈동자 색도 다른 아줌마들과 달랐다. 그런 엄마가 학교 행사가 있는 날 화장도 하고, 립스틱을 바르면 어딘가 모르게 우아한 태가 났다. 그런 날은 예쁜 엄마의 모습이 좋아서 엄마에게 맨날 그러고 있으라고 한 적도 있다. 그리고 엄마는 외모처럼 섬세하고 눈물도 많고 여성스러웠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프기 시작한 후로 엄마가 변했다.
사춘기가 시작된 무렵, 아버지가 아프셨다. 그리고 엄마는 별안간 우리 집의 경제적, 심리적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다. 아버지와 2년여의 병원 생활을 마친 후, 엄마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운전면허를 따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혼자 처리했던 땅 문제, 가계 빚을 엄마는 하나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대체로 빚으로 빚을 막는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거실에서 고지서를 보고 있는 엄마에게 그게 뭐냐고 물으면 너희는 알 필요가 없다고 했다.
엄마는 강해졌다. 아니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어느 여름날, 햇볕이 너무 강해 밭일을 나갈 수 없을 때, 거실에 앉은 엄마가 고지서를 벅벅 찢던 모습. 한치의 미련도 없이.
엄마는 해결이 된 돈이 적힌 고지서는 벅벅 찢었다. 대체로 전기요금이나 수도세였던 것 같은데 다른 빚은 해결할 수 없지만 그런 세금은 이미 이체돼서 가뿐하다는 듯이. 그러다 농협에서 온 고지서를 보고 나면 엄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깊은 생각에 잠긴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삶의 무게를 배웠다. 엄마는 말했다. 농사는 빚으로 짓는다고. 남는 게 없다고.
땅 문제로 동네 사람과 다툼이 났을 때 그 사람이 결국 도망치듯 뒤돌아서며 엄마에게 그랬다고 한다.
“아휴, 독하다 독해”
그러자 엄마가 그랬다고 한다.
“그래! 나 독하다! 누가 나를 독하게 만드는데!”
그때 엄마를 생각하면 안쓰럽다. 그렇게 여렸던 엄마는 남자처럼, 전사처럼 우리를 키웠다.
그리고 이제 그 고비를 다 넘기고, 엄마는 다시 드라마를 좋아하는 여자가 됐다.
이제 우리는 각자 자리를 잡고, 엄마는 다시 드라마를 좋아하는 여자가 됐다. 드라마를 보며 친구와 전화로 수다도 떠신다.
어느 날은 아이들을 데리고 집에 내려갔더니 거실이 확 달라졌다. 거실 한쪽 책장이 없어지고 화분이 생겼다. 정확히는 고지서나 땅 관련 서류들을 쌓아두던 물건이 사라지고 꽃나무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엄마는 내 공책들을 보여줬다. 너한테 물어보고 버리려고 챙겨놨다고.
거기엔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적은 일기장, 편지, 대충 끄적인 종이쪼가리까지 있었다. 몇 가지는 버리고, 일기장은 가져올 것도 아니면서 버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엄마는 잘 보관해 두겠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엄마는 종이를 벅벅 씻던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대충 낙서를 한 종이도 엄마는 꼭 내게 물어보고 버렸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는 그랬다. 엄마가 그럴 때면 나는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의 그런 섬세함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었다. 아주 어린 자식의 사소한 낙서라도 중요하게 여기는 엄마의 성품에 나는 감동을 받으며 자랐다. 그리고 그런 기억이 사람을 대하는 내 인성의 한 부분에 남아있길 바란다.
삶이 엄마를 거칠게 다뤘지만, 엄마의 고유한 성품은 바꾸지 못했다.
지난번에도 나는 집에 내려갔다가 머리끈 한 개를 두고 왔다. 그러자 엄마에게 바로 전화가 왔다.
“머리끈 놓고 갔더라. 잘 빨아서 말려둘게”
엄마는 여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