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에서 쌀을 푸려는데 바닥 긁는 소리가 들린다. 현미 8kg, 찹쌀 현미 4kg, 기장 500g, 차조 500g, 귀리 1kg, 혼합잡곡 2kg을 정기적으로 배달시켜 먹는다. 벌써 쌀 16kg을 다 먹었다니 역시 방학은 달랐다. 온라인 수업이라 할지라도 두 아들이 교대로 등교했을 때보다 분명 쌀 소비가 늘었다. 평소 50일에 한 번씩 쌀을 주문하는데 이번 달은 한 달 조금 넘었는데 쌀독 긁는 소리가 났으니 말이다. 방학 동안 밥하는 나의 수고를 덜기 위해 이삼일에 한 번은 배달음식을 먹었다. 여름이라 국수, 냉면처럼 분식도 자주 만들어 먹었는데 두 고등학생을 품은 삼남매 집 쌀 줄어드는 속도가 무섭다.
두세 살 터울로 이어진 오남매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부모님은 아들 낳아보겠다며 우리 집을 4녀 1남의 오남매 가족으로 만들었다. 지금처럼 먹을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기였다. 동네 골목에서 친구들이랑 놀다 잠시 정지(부엌을 이르는 사투리)에 들러 짜요짜요처럼 엄마 몰래 치약을 짜 먹었다. 정지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자, 가족들이 씻을 수 있는 수도꼭지가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치약, 칫솔도 정지 안 수도꼭지 근처에 있었는데 치약은 나만의 간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화한 맛의 민트향이 좋았나 보다.
오남매가 한참 성장하는 시기엔 엄마, 아빠는 쌀가마니가 푹푹 줄어든다는 말을 자주 했다. 광부였던 아빠가 월급 타는 날이면 온 식구가 둘러앉아 누런 봉투에 싼 통닭을 먹거나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어느 날엔가 국민학생인 언니와 난 “햄”을 먹어보고 싶었다. 있는 집 아이들이 도시락 반찬으로 싸온 것만 눈동냥으로 봤거나 TV 광고에서 접했을 것이다. 엄마에게 삼겹살 대신 햄을 구워 먹으면 안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엄마도 먹어 보지 못한 음식이었을까? 한 번 먹어 보자며 엄마는 언니와 나에게 햄을 사 오라며 심부름을 시켰다. 드디어 우리도 햄을 먹어본다는 설렘을 안고 동네 점방을 돌아다녔다. 광산촌 마을에 슈퍼마켓이라는 단어가 아직 낯설던 시기였다. OO상회라고 이름 붙여진 구멍가게에 햄이 많을 리 없다. 흔히 사 먹는 식재료가 아니었기에 한 개 정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일곱 식구가 배부르게 먹을 정도로 햄을 구하기 위해 살던 동네를 벗어나면서까지 언니랑 한참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이 가게에서 하나, 저 가게에서 하나씩 구입하여 드디어 우리 식구가 먹을 만큼의 충분한 양을 확보했다. 엄마는 이 상황을 예상하고 우리에게 그 일을 시켰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직접 사러 갔다면 가게에 하나밖에 없는 햄을 보고는 즉시 삼겹살로 메뉴를 바꿨을 게다. 그렇게 어렵게 공수한 햄을 얄팍하게 잘라서 구운 후 된장에 푹 찍어 상추와 깻잎으로 쌈을 만들어 먹었다. 분명 난 맛있었는데 그 이후로 그렇게 먹어 본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엄마, 아빠는 햄이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나 보다. 자식들이 먹고 싶다니 실컷 한 번 먹여준 의미였을 것이다.
몇 십 년이 지난 오늘, 우리 집 쌀독을 보며 올망졸망 뒤섞여 한 방에서 함께 먹고 잤던 어린 시절 오남매가 소환되었다. 지금처럼 급식이 없었던 그 시절, 학교 다닐 때도 도시락을 싸야 했으니 일 년 365일 엄마, 아빠가 우리들의 세 끼를 책임 지던 시절이다. 정부미 80kg 한 가마니를 사 놓아도 분명 푹푹 줄었을 것이다. 우리 집 쌀독에 쌀이 떨어진 것은 내가 쌀 주문을 조금 게을리한 탓이다. 하지만 우리 부모는 비워지는 쌀가마니를 보며 마음을 졸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쌀가마니를 채우기 위해 아빠는 매일 깜깜한 석탄 굴로 출근했다. 자식을 키울수록 자꾸 철이 든다. 철이 들면 마음이 무거워지나 보다. 우리 집 쌀독에 쌀이 똑 떨어진 모습에 강원도 태백 오남매 부모의 고단한 삶이 느껴져 마음이 묵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