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시간

모태신앙, 피아노, 교회 반주

by 천지랄

평소엔 관심도 없던 것들이 어느 날 갑자기 시야 한가운데로 들어와 머무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피아노가 그랬다.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태어나 보니 부모님은 기독교인이셨고,

자연스레 일요일 아침이면 디즈니만화를 뒤로 하고 오전 9시 어린이예배에 참석해야 했다.

'왜 꼭 재밌는 만화가 하는 시간에 예배를 드려야 하나.'

어린 마음에 하나님은 참 얄궂다고 생각했다.

엄마아빠, 동생과 매 주일마다 교회에 가서 어린이예배를 드리고 나면, 본예배인 11시 예배를 드려야 했다.

교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 예배까지 드린 후 집으로 돌아오면,

어느새 하루를 정리하고 월요일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11살의 어느 주일,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피아노 반주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주변의 말소리, 사람들의 움직임, 공간의 모든 물체들이 아득해지고

오직 까만 몸체의 피아노와 흑백의 건반만이 눈앞으로 끌어당겨지듯 들어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건반 위로 춤을 추듯 날아다니는 두 손가락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나도 저렇게 치고 싶다.'


당시 부모님은 큰아빠의 세탁소 일을 도와주고 계셨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안 일이지만,

큰아빠는 돈을 내고 배워야 하는 세탁 기술을 공짜로 가르쳐주겠다며

부모님을 불러 일을 시켰다고 한다.

부모님은 큰아빠에게 무임금 노동을 제공했던 셈이다.


나와 내 동생은 좀처럼 뭘 갖고 싶다거나 사달라고 하지 않았다.

누가 우리에게 일일이 사정을 말해주지 않아도, 그럴 형편이 아니란 걸 우리는 어렴풋이 느꼈던 것 같다.

그런 형편에 피아노를 배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자 더더욱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교회에서도 다른 건 보이지 않았다.

피아노가 없는 집이나 학교에서도 건반 위에 올려진 내 두 손만 선명하게 느껴졌다.


'모르겠다. 그냥 말이라도 해보자.'


"아빠, 저 피아노 배우고 싶어요."

"피아노? 그거 배워서 뭐 하려고?"

"뭘 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갑자기 배우고 싶어요."

"보나 마나 몇 번 다니다 재미없다고 할 거 아니냐?"

아빠는 내가 뭐든 금방 싫증 낸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몇 날 며칠을 조르자 아빠가 말씀하셨다.

"정 그렇다면,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네가 학원에 가서 선생님한테 여쭤 보던지.

먼저 가르쳐 주시면 돈은 나중에 드리겠다고 말할 수 있으면 해 봐."


피아노학원은 세탁소 바로 옆이었다.

내가 하는 건 뭐든 다 따라 하고 싶어 하는, 1년 반 차이나는 남동생의 손을 꼭 잡고 학원에 들어섰다.

안에서 천사처럼 예쁜 두 선생님이 나오셨다.

나는 아빠가 말씀하신 대로 말했다.

"피아노가 너무 배우고 싶은데, 아빠가 지금 당장은 레슨비를 낼 돈이 없대요.

아빠가 먼저 가르쳐 주시면 돈이 생기는 대로 주시겠대요. 우리 아빠는 학원 옆에 세탁소에서 일하세요."

서로를 잠깐 바라보시더니 한 선생님이 우리의 이름을 물었다.

"천지랄이요. 얘는 제 동생 천지웅이고요."

"어머, 천 씨니? 어디 천 씨인지 알아?"

"하늘 천이 아니라 일십백천 할 때 천이라고 했어요."

"그래애~~ 우리도 일천 천 씨야~ 나는 언니고, 옆에 선생님은 동생이야~"

이렇게 하늘의 도움을 받아 먼 친척뻘 쯤 되는 두 자매 선생님으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다.


동생과 나는 악기를 다루는 것에는 그다지 재능이 없었던 듯하다.

잘하지도, 그렇다고 그만두라고 해야 할 만큼 못하지도 않는, 딱 그 정도의 수준으로 피아노를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 배우겠다고 할 줄 알았던 가난한 아빠와 엄마는,

두 남매의 레슨비 외에도 집에서 피아노 학원까지 오가는 왕복 버스비까지 마련해야 했다.

당시 초등학생 편도 버스비는 50원이었고, 우리가 좋아하던 깐돌이바도 50원이었다.

나는 꾀를 내어 동생에게 말했다.

"지웅아, 너랑 나는 조그마니까 한 명은 초등학생, 한 명은 유치원생이라고 해서 50원만 내고 버스를 타는 거야. 그리고 남는 100원으로는 깐돌이바 하나씩 사 먹는 거야. 어때?."

"우와~~ 좋아!!"

"대신 기사 아저씨가 몇 살이냐고 물어보면 6살이라고 해야 돼. 알았지?"

한동안은 버스와 깐돌이바를 모두 누릴 수 있었다.

어느 날 기사 아저씨가 '둘 다 초등학생 같은데!' 하는 바람에,

그 뒤로는 학원에 갈 때는 버스를 타고, 집에 올 때는 깐돌이바를 사 먹으며 걸어왔다.


6학년 어느 날,

목사님이 피아노를 얼마나 칠 수 있는지 물었다.

이제 체르니 40번을 치고 있다고 했다.

"그럼 예배 반주도 할 수 있겠네~ 이제 지랄이가 예배 반주해라."

"네? 제가 어떻게요? 저 반주는 안 배우는데요. 바이엘, 소나타, 체르니 이런 것만 배워요."

"악보 볼 줄 알면 반주도 할 수 있어. 반주자가 재수를 해야 해서 반주하기 힘들다고 하니 지랄이가 해야겠다."

부탁이 아니라 통보였다.


다음 주 주일, 피아노 반주자 자리는 비어있었다.

목사님은 내 이름을 부르며 반주하러 나오라고 하셨다.

아무런 준비 없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물론 반주는 엉망진창이었다.

예배 반주라는 게 악보를 볼 줄 안다고 되는 그런 게 아니었다.


반주도 없이 축도가 이어지고 예배가 끝이 났다.

사람들의 대화 속을 뚫고 한 집사님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다.

"아니, 무슨 저런 애를 반주를 하라고 앉혀놔~ 예배 다 망쳤네."

반주가 엉망이었다는 건 내가 더 잘 알았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참고 참던 눈물이 터져 나와 교회 옥상으로 뛰쳐 올라갔다.

"내가 언제 반주하고 싶다고 했냐고~~ 못한다고 했는데 왜 시키냐고~~"

사람들 앞에서 하지 못한 말을 고래고래 지르며 대성통곡을 했다.

한참을 서럽게 울다, 한 수가 생각났다.

'예배는 일요일에 하니까 주보를 미리 받아 교회에서 연습하면 되지 않을까?'


"목사님, 저한테 주보를 미리 주세요. 아니면 어떤 곡을 부를지 정해지는 대로 저한테 알려주세요.

교회에서 피아노 연습해도 되죠? 학원에서는 못해요."

그 뒤로 목사님은 주일 전 예배에서 부를 찬송가 목록을 내게 주셨다.

나는 그 몇 곡을 자연스럽게 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아무리 연습해도 잘 늘지 않아 화딱지가 날 때면 뒤에서 수군거리던 어른의 말을 생각했다.

'쳇. 자기는 할 수 있나? 무슨 어른이 그래! 내가 꼭 치고 만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교회로 가서 화장실도 가지 않고 몇 시간이고 연습했다.

어떤 날은 저녁 시간이 된 것도 모르고 연습하다, 교회로 걸려온 엄마의 전화를 받고 집으로 갔다.

그렇게 몇 날 며칠, 몇 주를 연습하자 칠 수 있게 되는 곡도 늘어났다.

나중에는 플랫이나 샵이 5개씩 붙은 곡을 제외하고 연습하지 않은 곡도 칠 수 있게 됐다.


다시 내 평화로운 세상을 깬 것은 목사님이었다.

"지랄아, 이제 성가대 반주도 찬송가 말고 성가곡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To be continued.
다음 화에 계속.


이미지출처: Can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