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사고, 엄마의 전화, 회수권
중동에서 돌아온 아빠는 무기력해 보였다.
주변 사람들에게 어항과 산호초, 카펫을 팔아보려 했지만,
다들 고만고만하게 사는 형편에 선뜻 사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방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유리 어항.
그 안을 꽉 채운 커다란 산호초.
지하 단칸방을 덮고도 남는 카펫은
벽을 타고 올라가 끝이 말려 있을 정도로 컸다.
그걸 흔쾌히 사 줄 사람이, 적어도 우리 주변에는 없었다.
왜 돈이 아니었을까? 어린 마음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돈 대신 받으신 게 하필 당장 써먹지도, 팔지도 못할 저 짐덩어리였던 걸까? 모를 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립던 아빠가 그리운 아빠를 중동에 두고 온 듯했다.
아빠가 돌아오면 함께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일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방바닥에 앉아 장판을 뚫을 기세로 한 곳만 응시하는 아빠가 있었다.
같이 밥을 먹다 아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입에서 뜻 없이 나오기라도 하면
밥상이 엎어지기 일쑤였다.
'에이씨, 이 놈의 집구석'
머나먼 거리만큼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증폭되던 때,
그러니까 엄마와 나, 남동생이 함께일 때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행복했다.
엄마, 동생과 둘러앉아 김치에 물만 넣고 끓인 김치찌개를 밥상 가운데에 놓고
기다란 김치를 엄마가 주욱 찢어 하얀 밥에 얹어주면 그게 행복이었다.
아빠가 돌아온 뒤로 밥상은 달라졌지만
밥상에 앉을 때면 늘 긴장하고 눈치를 봐야 했다.
'오늘은 끝까지 밥을 다 먹을 수 있을까.'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교차로'라는 지역 신문에 우연히 눈길이 갔다.
그곳에는 생활에 필요한 모든 정보가 있었다. 무엇보다 '구인'란이 크게 들어왔다.
나는 하굣길에 교차로와 벼룩시장을 한 뭉치씩 들고 집으로 갔다.
'아빠! 이것 보세요~ 일 할 사람을 구한대요~ 같이 볼까요?'
나는 아빠 눈앞에 구인란을 펼쳐 자격조건을 하나하나 읽어 드렸다.
'아빠, 운전할 줄 알잖아요!'
'아빠, 컴퓨터는 할 줄 알아요?'
아빠가 글을 읽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아빠를 방바닥에만 붙잡아 두었다.
잔소리를 할 때나 짜증을 낼 때, 화를 낼 때만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그 외의 시간엔 중동에서 가져온 물건들과 같이 전시된 조각상처럼 하루 종일 앉아있을 뿐이었다.
아빠가 하루 종일 집에 있는 시간들이 영원처럼 길어졌다.
숨이 막혔다.
하교할 시간이 다가오면 집에 가야 했지만 집에 가는 발걸음이 잘 떼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재생공사라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됐다.
출근하는 아빠는 다시 생기가 도는 듯했다.
종종 회사에서 생겼다며 옷더미들을 가져오시곤 했다.
교회나 이모들에게 옷을 얻어 입다가 옷을 골라 입을 수 있게 되니 신이 났다.
누군가에게는 쓸모를 다한 옷들이 내게는 새로운 쓸모가 되어주었다.
하교 후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으레 집에 있어야 할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집안이 어수선했다.
동생이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렸다.
'지랄야, 엄마야. 엄마 말 잘 들어.'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응'
'아빠가 회사에서 사고를 당하셨어. 지금 수술 중이셔. 그런데 많이 다치셔서 엄마가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아.
언제 집으로 갈 수 있는지 아직은 모르겠어. 동생 잘 보고 있을 수 있지?'
'응?'
'동생이랑 집 잘 보고 있어. 엄마가 또 전화할게'
딸각.
'엄마야?' 동생이 물었다.
'응'
'뭐라셔?'
'아빠가 사고를 당했대. 수술 중이시래. 당분간 집에 못 오신다고 우리끼리 잘 지내고 있으래.'
동생과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 집에 쌀과 김치가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교회에서 반주를 하고 받은 쌀이 있었다.
밥을 짓고, 김치찌개를 끓여 동생과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치우고 나니 다음 날 도시락을 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과 볶은 김치를 넣은 도시락 두 개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었다.
뭐가 뭔지 모를 얼떨떨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어 동생을 불렀다.
'지웅아'
'응'
'회수권 남은 거 있어?'
'응, 몇 장 남았어.'
'그래, 그럼 일단 그걸로 며칠 버티고, 만약 그때까지 엄마한테 연락이 없으면 앞으로 조금 더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아.'
'왜?'
'차비가 없으니까. 걸어 다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