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좋아한다. 이제는 아이가 조금 글밥을 늘려야 할 시기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내가 먼저 그림책에 손이 간다. 어린 이들에게 전하는 간결하고 다정한 지혜가 좋아서 자꾸만 그림책들을 뒤적인다. 어쩌면 이렇게 따뜻하고 밝을까. 어쩌면 이렇게 깊을까. 그림책 작가들은 다들 영재교육이라도 받는 건가. 괜히 재능을 탓하며 그림과 글자 속을 누비는 철 안 든 아줌마다.
아이는 짧은 이야기라 시간이 적게 걸리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엄마가 자꾸 독서기록장을 쓰라고 재촉하는 탓이다. 글밥이 있는 책을 읽기도 하지만 그런 건 대부분 흥미 있는 캐릭터들이 나오는 이야기다. 게임 캐릭터, 만화 캐릭터, 유튜브 캐릭터 같은. 선생님이 그런 이야기는 기록장에 쓰지 못하게 한 탓에 긴 글을 읽고 쓰는 건 바라지 못한다.
그림 한 장면과 함께 내용에 대한 생각을 남기는 게 아이의 기록이다. 학교 숙제 외에는 학원도 안 다니고 다른 공부나 숙제도 없기에 가능하면 하루에 하나씩 적어보라고 하지만 일주일에 하나 쓰기도 버거워한다. '한 줄도 괜찮다 뭐라도 남겨라'라고는 하지만 결국엔 촘촘한 글씨로 좁은 바닥을 가득 메꿔내고야 마는 아이다. 그래도 늘 "어려워, 생각 안 나. 뭘 써야 할지 모르겠어."로 시작해서 두세 시간을 빈둥대야 한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또 다시 보고, 간식을 가져와 냠냠 먹는다. 그리고 거실 바닥에 누워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뭐 해? 오늘은 독서기록장 쓰지?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어. 너무 어려워. 다른 거 할래.
그리곤 또 다른 책을 가져와서 여러 번 다시 보고 다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창작의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아이인 줄 알면서도 조금 더 가볍게, 겁 없이 썼으면 싶은 엄마는 자꾸만 말을 보탠다.
-누가 나오는데? 뭘 했는데? 마음에 드는 장면이 있어?
-뭐라고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어.
-아무렇게나 시작해. 하고 싶은 대로.
멋들어지지 않아도, 딱히 남는 게 없어도 그냥 그런 걸로 지나가도 괜찮은데 완벽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딱하다.
그냥 해내기만 해도 충분해.
그러고 보니 그 모습 엄마와 똑같다.
쓰고 싶은데 올리지 못한 글들이 너무 많다. 시기를 놓친 글들도 있고 정리되지 않아서 아직은 올리기 싫은 글이 대부분이다. 안고만 있다가 잊혀버릴 거라면 허접한 지금의 기록이라도 올려야 하는데. 자꾸만 드는 생각은 많고 뒷전으로 점점 밀려나는 편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