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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06. 2023

시작, 그 피곤한 여정(2)

잠만 좀 잘게요

폰과 동행하던 남자가 사라진 뒤 허탈함에 주저앉은 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식당 주인이 경찰서를 알려주며 신고해 보라 했다. 하지만 경찰은 형식적으로 보고서를 작성할 뿐 못 찾을 거라 말했다. 갈 곳이 없다. 기운 없이 거리를 지나는데 문을 닫고 있는 식당이 보였다. 무턱대고 들어가 애원해 본다.

"죄송한데 바닥에서 침낭 깔고 잠만 잘 테니 허락해주세요."

구구절절 설명해 보지만 딱 잘라 거절한다. 당연하다. 누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사업장에 재워줄까?


정말 멘 땅에 자야 하나 싶다. 말 통하는 사람한테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 문득 낮에 적어둔 한인교회 번호가 떠올라 다시 한번 전화를 건다. 낮에는 연락이 되지 않던 곳이다. 신호음이 울리고 낭랑한 목소리의 여자가 경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죄송한데 워킹홀리데이로 온 학생인데요. 잘 곳이 없어서 그러는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나요?"

여자는 이름, 나이 등을 묻더니 혹시 전철을 타본 적 있나 물었다. 직접 태우러 왔다 돌아가기엔 시간도 많이 걸리고 기다려야 하니 인근역까지 올 수 있으면 앞에서 기다리겠다 한다. 까짓 전철쯤이야 가릴 처지가 아니다. 상세하게 불러준 노선과 내릴 역을 메모하고 전철로 향했다.


도심의 전철은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기에 정신이 없지만 제 방향을 찾은 것 같다. 영어방송을 알아듣지 못할라, 하나라도 놓칠라 긴장하며 한참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전철이 멈춰 섰는데 문이 안 열린다. 당황해서 주변을 둘러보니 문 옆의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 출발할까 놀라 급히 버튼을 누르고 허둥지둥 뛰어내렸다. 휴우. 도심과 달리 변두리역은 뭔가 허술해 보인다. 지하철역과 기차역의 중간쯤? 지하도 대신 전철 선로 위를 걸어 지나는 인도(?)가 있고 전철이 들어올 땐 선로 위 인도 양편의 철조망 문을 닫는다. 함께 내린 사람이 없었으면 나갈 줄 몰라 역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뻔했다.



깜깜한 역 앞에 화장기 없지만 단아한 얼굴의 여자가 나와있다. 교회 전도사라 소개하며 내 목소리가 왠지 믿음이 갔다 했다. 공휴일을 맞아 교회 수련회를 갔다 왔다 묻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앞장섰다. 집에 사람이 많지만 하룻밤 재워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반갑다. 전도사님의 집엔 방마다 학생들이 세 들어 살아서 좁은 집에 사람이 북적였다. "저녁은 먹었어요?" 아.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하루종일 아무것 안 먹고도 배고픈 줄 몰랐다. 물음에 비로소 허기가 몰려왔다. 흰쌀밥에 김, 김치, 국 한 그릇. 긴장이 풀리고 눈물이 핑 돌았다. 따뜻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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