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광고 문구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즐거움, 행복을 위해 사는 것 같다. 만난 이들마다 행복을 기원한다.행복하라고 행복하게 살자고 말한다. 미디어에선 이 물건을 이용하면 더 여유롭고 행복해질 것이라 광고하고 SNS에선 서로 누가 더 행복한가 내기하듯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 행복한 순간을 자랑한다.
그 옛날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도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 했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대부분 철학자들도 동의했다. 그러나 무엇이 행복이며, 인간이 언제 행복하냐는 데에는 의견이 달라진다. 스토아학파들은 덕을 실현할 때 행복하다고 하는 반면, 에피쿠로스는 쾌락이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다.
인간은 즐거울 때 행복하고, 불쾌할 때 불행하다. 개그 프로그램을 보거나 즐거운 놀이를 하면 행복을 느낀다. 반대로 벌을 받거나 몸이 아플 때, 또는 기분이 우울할 때에는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낀다. 행복은 즐거움과 연관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회가 발전하면서 여유시간이 늘고 오락거리는 다양해졌는데 행복이 그만큼 폭발적으로 증가했는지는 의문이 든다. 지금의 행복이 100년, 1000년 전의 행복과 비교해서 더 크고 깊을까?
우리나라는 2023년도 행복지수가 전 세계 147위 중 57위로 그리스, 콜롬비아, 튀르키에 같은 최악의 경제위기나 재해를 겪은 나라를 제외하면 OECD 최하위권이라고 한다. 비슷한 순위의 나라들보다 1인당 GDP(파란색지표)나 평균기대수명(연두색지표)이 월등히 높음에도 이렇게 순위가 낮은 이유가 무엇일까?
2023 세계행복보고서
행복을 측정하려는 다양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있다.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같은 호르몬의 양으로 일반적인 행복감의 정도를 짐작하는 것이다. 도파민은 평상시를 100으로 잡았을 때 명상이나 개와 산책은 60, 좋아하는 사람, 친구들과 연락, 대화할 때는 120, 중독을 유발하는 술은 150, 게임은 175라고 한다. 키스는 195, 성관계는 200으로 도박에 성공했을 때와 같은 수치이다. 오르가슴은 남 240, 여 480으로 큰 차이가 나고 로또 1등 당첨이나 첫사랑과 사랑에 빠지면 750까지 간다고 한다. 마약의 경우 주사 한방에 1250까지 가는데, 이렇게 엄청난 쾌락을 손쉽게 얻게 되면 일상적인 생활에서는 행복감을 느낄 수 없고 의지조차 생기지 않으므로 위험하다고 한다.
도파민은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자극에 반응해 더 분비된다. <도파민네이션>의 저자인 정신의학 전문의 애나 램키 박사는 현대 사회에 곳곳에서 쉽게 얻는 쾌락적 자극들이 도파민을 지나치게 분비하도록 유도하여 도파인의 정상적 분비 수준(베이스라인)을 떨어뜨려 우울해지게 하고 쾌락에 집착하게 하는 악순환을 만든다고 말한다.
행복은 사전적으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껴 흐뭇한 상태라고 한다.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의 흐뭇하고 흡족한 마음이나 느낌이다. 행복은 욕구 충족을 기본으로 한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고 자는 것부터 이성적, 정신적인 만족까지 욕구는 다양하지만 이것들이 채워지는 것이 행복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은 익숙해지면 그 정도가 약하다고 느껴진다.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이 1974년 주장한 이스털린의 역설에 따르면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이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고 한다. 소득이 늘어나도 욕구 수준이 늘어나면 행복감이 늘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이 욕구라는 행복을 위해 모두가 애쓰고 있다. 지금보다 큰 행복을 느끼려면 수입이 최소 2배 이상 늘어야 한다는데 비효율적이게도 잘 느끼지 못할 행복을 위해 물리적, 시간적노력을 하는 게 대부분이다.
욕구는 에너지이고 칼이다. 쓰는 방법에 따라 흉기가 될 수도 좋은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욕구는 본질적으로 나를 위한다. 내가 배불러야 하고 내가 즐거워야 하며 내가 안전하고 편안한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타인의 행복이나 안전에 반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상처보다 내 손톱 밑의 가시가 더 커 보이는 것이다. 또한 욕구는 지금을 위한 것이다. You Only Live Once. 기쁨과 만족을 미뤄두지 않는다. 각자 욕구만을 추구할 때, 필연적으로 부딪히고 문제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욕구와 다른 개념으로 의미가 있다. 의미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가치를 위해 주도적으로 노력하는 삶이다. 사기로 혼자 배불리 먹고사는 것은 좋은 일이라 인정받지 못한다. 또 스스로 노력한 게 아니라 상황이 만들어지거나 다른 누군가의 통제에 의한 것이라면 그 또한 의미 있는 삶이라 하기 어렵다. 의미 있는 삶은 가정이나 국가, 아이들같이 타인을 향한다. 의미란 목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인생에 어려움은 시기의 차이일 뿐 누구도 피할 수 없는데 욕구로 대표되는 행복은 이런 어려움 앞에 좌절한다. 원했던 대학에 가지 못해서 실망하고, 취업이 안 돼서 무너진다. 스스로 바라는 바가 이뤄지지 않을 때 지금 이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
그런데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의 연결성 속에서 바라본다. 맥락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 어려움을 통해 훈련되어 더 강하고 숙련된 모습으로 성장하는 데 주목한다. 비록 과거가 어렵고 힘들었어도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말한다. 현재가 어려워도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육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도록 돕는 의미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단지 아이가 귀여워서 기른다면 아이의 외모나 성향이 사랑스럽지 않을 때 걸림돌이 된다. 아이를 기르며 겪는 여러 불쾌한 상황과 투자해야 하는 수많은 노력은 참기 어려워 외면하게 될 것이다. 쉽게 유기되는 반려견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장에 의미를 둔다면 더 나아지는 아이와 부모의 모습을 기대하며 어려움도 견딜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이 더 이상 귀엽지 않은 사춘기 아이들의 반항도 참아낸다.)
공자가 논어 위정편에서 공자가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욕망을 따라 행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하는 걸 보면 행복과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은 흔치 않기에 칭송할만하고 일반적이지 않다. 대개 상충되는 부분이 더 많은 듯하다.
인생에는 두 가지 비극이 있다.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갖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아일랜드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행복을 원하면 이뤄지지 않아서 괴롭고, 이뤄지면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고 다른 더 큰 행복이 있어야 만족할 수 있기에 괴롭다. 이 지점을 이해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학파는 추구하는 바는 달랐지만 방법에 있어서 유사하다.
우리는 하루살이가 아니기에 한순간의 즐거움으로 살 수 없다. 인생을 통틀어 행복의 양이 고통의 양보다 많도록 유지해야 하는데 육체적인 즐거움은 강하지만 짧고 더 큰 불쾌감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실컷 술을 마신 다음날 후회한다거나 한꺼번에 돈을 다 써버리고 곤혹을 겪는 경우다.
그래서 강하고 순간적인 쾌락보다는 약하더라도 지속적인 정신적, 문화적인 행복감을 유지하라고 한다. 책과 문화를 가까이하여 동물과 달리 순간의 쾌락과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 않도록 훈련하라는 것이다. 이 안정된 마음(아타락시아 ataraxia)이 스토아학파가 말하는 욕심이 없는 상태(아파테이아 apatheia)와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물질적, 물리적인 행복의 비교가 너무 대중화되었다. 아파트의 크기에 따라, 차의 가격에 따라, 직업별 수입에 따라 행복을 규정한다. 그 물리적 크기가 자신이 받아야 할 행복의 크기라 생각하고 주변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한다. 그만큼의 친절, 배려, 이해, 편의를 요구한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행복은 일차적이고 본능적이어서 서로에게 자꾸 흠집을 내고 있는지 모른다. 숭고한 의미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헤집어서 자신의 행복의 도구로 전락시킨다면 그 누가 버텨낼 수 있을까?
진정한 행복은 물질에서, 소유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느껴지는 게 아니라 (의미를) 발견하고 부여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향할 때 풍성해진다. 조건 없이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지속적인 행복이 가능하다. 행복 권하는 사회에 이 행복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