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여기 가봐."
방값을 걱정해야 할 때쯤 일이 생겼다. 내가 사는 방에 먼저 살았던 언니가 하던 일이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짙은 이목구비, 화장도 곱게 한 언니는 한국형 미인으로 내 또래나 동생처럼 보였다. 2주 넘게 이력서를 돌려도 일을 못 구하고 피가 말라가는 나를 안타깝게 여긴 언니가 자기가 일하던 청소업체 슈퍼바이저에게 소개해준 것이었다.
은행 청소라고 했다.
한국의 은행 내부는 보통 커다란 홀에 은행원들이 옆으로 나란히 앉아서 고객들을 순서대로 호명해 맞이하는 다대다 대면형이다. 그런데 호주에서 본 은행들은 은행원들이 각자 개인 방을 가지고 고객이 방 안에 들어가서 1대 1로 마주 앉아 이야기를 했다. 동전교환과 같은 업무는 로비 인근에 따로 처리하는 매대가 있었다. 고객들이 기다리는 공간도 각 방도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형태였다.
첫날 한국인 슈퍼바이저가 업무를 소개해줬다. 청소임에도 일은 너무 손쉬웠다. 그날 업무를 마친 은행 사무실을 정리하면 되는 거였는데 화장실 청소도 따로 없었다. 열쇠로 입구를 열고 들어가 입구 옆에 위치한 보안벨의 전원을 끈다. 그리고 각 방을 돌며 책상 아래에 있는 휴지통을 수거하는데 비닐째 빼고 새 비닐을 씌워 너덜거리지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해 놓으면 된다. 쓰레기라곤 대부분 업무에서 쓰고 버린 폐지들이라 더러울 것도 없었다. 책상의 서류들은 건드리지 말고 빈 곳만 살짝 훔치고 바닥을 청소기로 돌리는 정도가 다였다. 아무리 천천히 해도 40분이면 끝났다. 쓰레기를 챙겨 보안벨을 켠 뒤 나와서 문을 잠그면 끝이었다. 슈퍼바이저는 열쇠를 나에게 맡기고 주의사항을 알려준 뒤 떠났다.
문제는 이 은행이 시내라는 것이었다. 변두리에 살고 있으니 이곳에 오려면 버스를 타던가 해야 했는데 한 번에 3불짜리 버스를 타기엔 부담이었다. 일주일 식비 1불로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운동하는 셈 치고 구글맵을 따라 걸어가기로 했다. 중간에 횡단보도들 몇 번씩 지나는데 집에서 은행까지 빨라도 1시간 40분이었다. 40분 청소를 위해 3시간이 넘게 걸어 다녀야 했다. 월, 화, 수, 목, 금 매일 걷다 보니 발바닥이 아파왔다.
한 번은 청소를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길가 테니스장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테니스를 치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곁을 지나가다 보니 저 사람들과 나의 상황이 비교가 됐다. 행복한 저 사람들과 나 사이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고민도 했다. 우울한 감정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왔지만 그럼에도 즐겁게 다니려 애썼다. 도로 옆을 걸어가니 조금 시끄럽게 해도 큰 상관이 없었다. 나 홀로 고성방가 수준으로 노래연습을 하며 스스로에게 기운을 북돋웠다.
청소를 다닌 지 2주째, 비 오는 날이었다. 우산을 옆에 세워두고 쓰레기를 정리하는데 슈퍼바이저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깜빡하고 들어간 뒤 보안벨 해제를 하지 않아서 보안업체가 출동했다고 했다.
허걱. 어쩌지.
출동 한 번에 백 불 가까이 배상해야 한다고 했다. 보안벨 해제가 제일 중요하다 하지 않았냐는 목소리가 따가웠다. 보안업체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주고 상황 설명을 하고 어떻게 했는지 정신없이 청소를 마치고 나왔다. 늘 전화로만 상황을 확인하던 슈퍼바이저가 앞에 와 있었다. 청소물품을 확인해야 한다며 나에게 열쇠를 받아갔다. 금요일이었다. 주말이 지나가도록 그는 열쇠를 돌려주지 않았다.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 어떤 설명도 없이. 딱 한 번의 주급을 받고 나는 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