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우리 집엔 크리스마스 트리가 없다. 어떤 크리스마스 장식도 없다. 매해 부랴부랴 챙기긴 하는데 솔직히 올해는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지나가면 안 될까 싶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꺼내기도 귀찮지만 꺼내면 넣기도 귀찮은 법. 작년엔 다이소 크리스마스 트리 풍선 하나 세워두고 넘어갔다. 재작년엔 나무막대를 몇 개 연결해 만든 벽걸이 트리와 색종이를 눈송이 모양으로 잘라 붙인 트리. 갈수록 크리스마스 트리에 대한 성의가 없어진달까?
아이는 어릴 때부터 산타를 안 좋아했다. 어린이집에서 산타행사를 하면 산타가 무서워서 울고 불고 선물도 못 받아갔다. 해가 바뀌어도 산타를 경계하는 건 크게 변하지 않았다. 7살이 되어서야 아무렇지 않게 선물을 받을 수 있었는데 "엄마, 산타는 (유치원)기사님이었어."라고 귓속말을 해줬다.
나는 산타에 대해 이야기해 준 기억이 없다. 남편은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몇 번 "울면 선물 못 받는대." 협박(?)을 하긴 했지만. 선물값을 받는 것도 아니고 울면 선물을 안 준다니 너무 치사하잖아? 산타행세를 하거나 산타가 왔다 갔다는 둥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본 적도 없다. 당당하게 선물은 엄마, 아빠가 주는 거니 받고 싶은 선물이 있으면 엄마, 아빠한테 말하라고 했다.
크리스마스의 비밀을 알려주겠다는 짧은 영상을 아이와 우연히 봤는데 초등학생 이하는보지말라는 경고에도 아이는 끝까지 영상을 시청했다. 지금 우리가 아는 빨간 옷의 산타는 코카콜라가 영업을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라는 내용.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아는 것 같다. 산타는 상술이라고.
아이가 자러 가다 말고 와서 포옥 안기면서 한 마디를 꺼냈다. "엄마, 나 이번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낼래." "그래? 뭐 하면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는데?" "음.. 크리스마스트리 만들래." "크리스마스트리? 왜?" "산타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트리 밑에다 선물 놔두잖아." "크리스마스트리 없으면 선물 안 놔둔대?" "응." 그렇구나. 만들어야 되는 거구나. 크리스마스 이브에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자니 너무 귀찮지만 해야 된다니 해야지. 근데 너 다 알면서 선물 받겠다고 산타 있는 척하는 거지?
"무슨 선물을 받고 싶은데?" "음.. 뭐 하지? 게임 하루종일 무제하.. 아. 아니고. 현질 안 되지?" "응. 다른 거." 그런 선물은 산타한테 어떻게 받으려는 걸까? 아들? "당근칼?" 찌릿. "아니고. 그 영상에서 본 999 레벨 당근."
당근칼은 당근같이 생긴 주황색 장난감칼인데 실제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어 학교에서 소지 주의 안내가 수차례 왔다. 아이가 본 영상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당근칼을 소개했는데 그 중 최고 레벨로 생당근을 내밀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