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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29. 2023

엄마로 산다는 건

ㅇㅇ과 싸우며

아이가 아프다. 어제 새벽 기침이 심해지더니 열이 올라 어지러워했다. 감기기운이 있던 터라 후두염이나 인후염을 예상하고 병원에 갔더니 후두는 깨끗하다고 했다. 독감검사를 권했으나 이미 한차례 독감을 앓은 터라 또 심하게 열이 오르진 않겠다 싶어 세균성염증을 생각하고 항생제없는 감기약만 받아 나왔다. 아이는 아프면 소화를 못 시킨다. 모든 에너지가 병과 싸우는데 쓰여 소화기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두어 차례 토하기에 아차 싶어 배 마사지를 했다. 방귀가 나오길래 됐다 소화가 되는구나 하고 밥을 먹였다.




아이와 의사소통이 되면서부터 아프면 아이에게 이것저것 묻는다. 어디가 아파? 언제부터 아팠어? 어떻게 아파? 쉬는 했어? 똥은? 방구는 나왔어? 물은 언제 마셨어? 얼마나? 그럼 괜찮겠다. 했더니 아이가 물었다.
-엄마 의사 선생님이야?
-아니. 왜?
-엄마 의사 선생님 같애.



아이가 생기고 엄마가 되면 할 일이 많다. 알아야 할 것, 해야 할 것이 많다.
대가족사회에서는 함께 하는 동거인들이 아이의 세계가 되어 필요한 부분을 채웠다. 요리를 하기도 하고 잠깐 아이와 놀거나 대신 생필품을 사 올 수 있었다. 그러나 핵가족화되면서 부모가, 특히 엄마가 아이 세상의 대부분이 되었다. 대개 엄마는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입히고 가르치는 일을 도맡아 한다. 집을 치우고 관리하고 경제활동까지 더해지면 몸이 열개라도 모자란다는 말이 딱이다. 엄마도 갓 엄마로서의 삶이 시작되어 모든 걸 배워가야 하는데 말이다. (엄마들이 멀티능력과 생활지능이 높은 건 다 역할에서 온 산물일 것이다)

특히 내 아이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아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잘 먹는 것과 안 먹는 것, 성향, 태도뿐 아니라 아이의 몸과 건강도 알아야 한다. 아이의 주치의로서 빠르게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새벽에 아이가 다시 열이 났다. 피곤해서 옆에서 토닥이다 잠들었는데 아이 움직임이 이상했다.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손을 부들부들 떨기에 열성경련인가 싶었다. '몸은 따뜻하게 머리는 차갑게'가 기본인데 피곤함에 물수건을 깜빡했다. 스스로 놀랄 아이에게 괜찮다고 안아서 다독인 다음 물수건을 가져오겠다 말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수건을 짜는데 커다랗게 격양된 목소리를 들었다. 아이는 부들거리는 양손에 옷을 꼭 쥐고 강하게 퍼덕였다. 침대 끄트머리에 서서 기괴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얼른 아이를 안아 수건으로 아이의 얼굴을 닦았다. 무서운 것이 있다고 했다. 도둑이라고도 했다. 열성 환각이구나. 처음 보는 상황이 아찔하고 무서우면서도 제 힘껏 무서운 것과 싸우고 있었던 아이가 기특하고 대견했다. 간단한 염증성 열일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이렇게 계속 열과 싸우는 걸 보니 독감이다. 저번과 다른 녀석인가 보다.




여기저기 발만 담그는 내가 가벼이 이야기할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안아키(안전하게 아이 키우기)이고 싶다. 무식하게 대처 없이 아픈 아이를 방치한다는 식의 지탄받았지만 사실 그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아이를 공부하고 병을 공부했다는 걸 안다. 무조건 병원을 가면 안 된다는 게 아니라 필요한 때에 필요한 치료를 골라 받자고 한다. 치밀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처음 들어가면 대표인 한의사분이 병의 원리를 공부하고 이해하라 권하고 그들 스스로도 각국 언어로 된 논문들을 헤집으며 병에 대해 이해하려 애썼다. 이미 아픈 아이들을 키우며 많이 헤매고 고생한 탓이다. 나처럼 아이 아플 때 잠깐 들어가서 치트키를 찾지 않는다. (문제가 있었다면 나같이 자각 없는 부모의 무분별한 따라 하기 때문이었을 거다) 병의 원인이 생활에 있음을 이해하고 직접 장에 좋은 먹거리를 해주기 위해 손품, 발품을 아끼지 않는다. 대증치료로 손쉽게 약을 먹이거나 주사를 맞히면 끝이 아니라 아이가 계속 가져갈 면역을 만들어주기 위해 번거로워도 다양한 방법을 습관이 될 때까지 제공하고 두려울 때도 아이를 믿으며 시간이 오래 걸려도 참고 기다린다.



요즘 병원은 자세히 검사하지 않고 항생제를 남발한다. 작은 병에도 부적절하게 과도한 치료를 받으면 아이들의 대장 내 미생물환경이 초토화되고, 간편한 식습관에 다시 채워지지 않는다. 면역력이 떨어진 아이들은 자주 아프게 되고 더 오래 더 많이 약을 먹으며 더 약해진다. 그래서 어릴 때 병원에 가기 시작하면 매 철마다, 달마다 감기와 기타 질병을 달고 산다. 그럼에도 약 먹으니까 괜찮을 거라는 어렴풋한 믿음으로, 크면 괜찮아진다는 막연한 기대로 ㅇㅇ에 좋은 음식, 제품만 찾는 부모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할 것이 많아 공부할 수 없고,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 건강에 대한 주도권을 스스로 전문가라 말하는 제3자들에게 모두 내어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적어도 왜 이 치료를 하는지, 어떤 위험이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한다.

타미플루를 맞고 환각에 시달리다 뛰어내려 사망한 청소년이 있었다. 타미플루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라 본다. 고열을 내리려 강하게 눌렀더니 반작용으로 더 높은 고열이 올라왔을 것이고 고열에 일어날 수 있는 문제 상황과 대처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보호자가 옆에 있지 않았다. 십 대가 되도록 스스로 병과 싸워본 기억이 없었기에 대처하지 못한 채 끙끙 앓고 싸우다 삶의 주도권을 놓친 것이다.



나 역시 마음이 갈대 같아서 가볍게 약을 먹여 지나가고 싶은 마음에 자주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는다. 묻지도 않고 어김없이 처방되는 항생제를 보며 이걸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금방 낫길 바라는 마음에 먹였다가 후회하길 반복한다. 좋은 생활습관을 갖추고 흔들리지 않으면 어려움이 올 때도 아이 스스로 천천히 배워갈 텐데 매번 그 사이를 오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조금씩 배워가고 익숙해지고 있으니 아이도, 아이의 몸도 병을 이해하고 대비해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어지럽지 말라며 가볍게 먹인 해열제가 더 높은 고열로 돌아왔다. 그래도 아이는 이겨내고 오늘을 산다. 아마 하루 이틀쯤이면 열은 자연히 내릴 거다. 꾸준히 아이의 팔다리를 주물러 혈액순환이 잘 되게 해 줘야지. 배를 잘 문질러주고 소화 잘 되는, 대장환경에 좋은 음식들을 챙겨줘야지. 코가 막히지 않게 따뜻한 수증기를 마시도록 챙겨줘야지.
-엄마 열이 나는 건 몸속에서 백혈구가 바이러스랑 싸우고 있는 거야
그래. 백혈구도, T세포도, 마크로파지도, 모든 면역계가 바이러스와 싸울 수 있는 무기로 비타민C도 잘 챙겨줄게.

엄마는 오늘도 널 배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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