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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망 Dec 05. 2024

보편적인 사람들의 순정만화

강풀

작년에 나온 <무빙>을 재미있게 봤다. 강풀 작가의 웹툰이 원작이라는데 드라마만 봐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근래까지 꾸준히 웹툰을 올리셨는지는 미처 몰랐다. 확실히 강풀 작가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듯하다. 내가 기억하는 강풀작가는 근 20년 전 이야기다. 순정만화 시리즈로 한창 핫했을 당시다. 그러고 보면 강풀 작가는 웹툰의 시조새 격이다. 처음 세로로 긴 웹툰의 형식을 만들다시피 한 사람이다.



강풀(본명 강도영) 작가는 상지대 국어국문과 출신인데 한겨레신문의 박재동 만평을 인상 깊게 보고 만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당시 상지대 사학비리에 대한 대자보와 투쟁만화들을 그리기도 했다. 민중만화, 시사만화를 위주로 그리다 보니 졸업 후 다른 신문사들과 잡지사에서 결이 다르다며 퇴짜를 많이 맞았다. 1990년대 말 당시 엽기코드가 유행이었던 탓에 구토, 배설물 등이 나오는 엽기물 <배설물>을 본인의 홈페이지 강풀닷컴에 올렸다. 그 인기에 힘입어 스포츠서울에 <일상다반사>를 2년여 연재하지만 본인의 그림실력에 한계를 느끼고 그림은 잘 못 그리지만 이야기로 승부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마침 다음에서 제의가 들어와 6개월을 준비해 시작한 것이 첫 장편 웹툰 <순정만화>였다. 그전까지의 더러운(?!) 이미지를 쇄신하고 자신을 순정만화작가라고 소개하고 싶어 제목을 그렇게 지었는데 이 웹툰이 크게 반향을 일으켜 17편에 이르는 장편웹툰들을 연재하게 된다.


<일상다반사>


그는 소설가를 하기엔 문체가 떨어지고 화가를 하기에는 그림 실력이 떨어지는데 그 중간 지점의 만화가가 된 것이 구원이라고 까지 말한다. 누군가의 문하생으로 그림체를 따라 그려내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로서 등장한 것이다. 모든 만화의 시나리오-대사와 지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써놓고 작업에 들어갔다는 그는 대부분의 작품이 30편 완결로 내용이 늘어지지 않고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전개한다. 앞뒤가 딱딱 맞고 빌드업으로 뿌렸던 모든 떡밥을 뒤에서 다 회수하거나 반전이 좋아서 몇 번이고 다시 정주행 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장기 연재이면서도 타이밍-어게인, 무빙-브릿지처럼 스토리가 연결되는 방식도 취한다. 그는 평범한 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부터 액션 스릴러 장르의 다양한 소재를 다루는데 귀신, 저승사자, 초능력, 첩보 등이 거시적으론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결된다. 강풀유니버스라고나 할까.

그의 모든 작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휴머니즘으로 가족애나 사랑 등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을 가져와 감동을 이끌어낸다.



당시는 신문 만평 외에는 세로형식 만화가 잘 없었는데 강풀은 컷만화를 배우지 않았던 덕분에 컷으로 생각하지 않고 '못하는 것 잘하려고 하느니 그냥 내 방식대로 한번 해보자'고 대자보를 그리듯 시작했다. 주류가 아니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가 가능했다. 모든 게 처음이라 기준이 없던 시기였기에 한 회 고료가 8만 원밖에 되지 않았다며 월 64만 원을 받으면서도 장편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일부러 원고를 길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림을 한 컷이라도 덜 그리려고 그림대신 내레이션을 자주 활용했다. 그러나 매일 연재를 하기에 매일 마감과 싸우며 일 년에 4번 정도만 술을 마셨다는 그는 작가가 게을러지는 순간 독자들이 귀신같이 알아낸다며 한 컷만 더 그리고 싶은 연재지각 작가로서의 고충도 말했다. 아직도 새벽 4시 반까지 작업실에 출근해서 오후 6시까지 극본을 쓰다 간다는 그는 자신의 능력을 충실히 쏟아내는 창작자다.



강풀의 웹툰들은 그 탁월한 스토리 덕분에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등으로 많이 영상화되었다. 그러나 아파트(전국관객 64만), 바보(전국관객 87만), 순정만화(전국관객 73만)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해서 강풀 만화는 영화화하면 실패한다는 이야기도 많았다. 강풀 본인이 2차 제작물에 대한 감독의 창작을 존중해 관여하지 않은 탓에 콘티나 플롯의 변형이 심해지고 분량이 압축되는 등 원작의 묘미를 살리지 못하면서 원작 팬의 몰입을 이끌지 못한 탓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연극에 이어 2011년 2월 개봉한 영화도 호평을 받는데 저예산(10억)으로 만들어 전국 165만 관객을 동원하고 성공(손익분기점 전국 65만)을 거둔다. <이웃사람>(2012년 8월 개봉)은 전국 130만이 관람하고 <26년>이 295만 관객을 기록하며 그의 원작 영화 중에서는 가장 흥행을 했다.

그 후 무빙 극본에 처음 참여하게 되었는데 제작진과 제작어법이 달라 어려움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초능력물에서 초능력이 거의 나오지 않고 대신 로맨스물처럼 캐릭터들의 서사를 보여주면서 굳이 어려운 방법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는 모험을 했다. 그러나 10, 11화를 기점으로 엄청난 반응을 일으켜 훌륭하게 마무리지으며 '2023년 제5회 아시아콘텐츠어워즈 & 글로벌OTT어워즈 작가상'을 수상했다.

12월 4일 오늘 또 디즈니 TV에서 강풀의 <조명가게>가 드라마화되어 방송된다. 이 역시 강풀 작가가 직접 극본을 작업한 작품이다. 새롭게 구현된 그의 상상 속 이야기는 또 얼마나 인기를 끌지 궁금증이 인다.



강풀 작가를 보면 논란도 많았다. 컷을 덜 그리려고 자신의 캐릭터를 복사해서 과도하게 재사용한다거나 정치성향에 관련된 논란이다. 그의 단점인 그림실력과 그의 시작점인 민중만화의 성향 탓인데 논란은 부인할 수 없겠지만 그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시대에 맞춰 100% 잘 활용해 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 소소한 능력들이 딱 맞물려 돌아가면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딘가에서 배우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열정으로 찾아가며 이룩해 낸 결과물들이다.


우리는 어떤 탁월함을 갖추기 위해 경쟁하고 애쓰지만 잘하는 사람은 많고 우리가 가진 것들은 적고 보잘것없어 보인다. 그러나 작은 장점, 능력들이 뜨거운 열정으로 잘 버무려 지기까지 버텨낼 수만 있다면 그 결과물을 보게 된다. 오랜 시간의 노력이 빚은 조화로움은 각자만의 탁월함이 될 것이다. 자주 실패하고 많은 어려움들을 만나 깨지면서 갖춰가는 과정들이 순수하고 바른 것만 남기는 우리의 순정만화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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