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일기_20251023_입사 378일차
프리랜서: 월급 빼고 다 좋아!!
직 장 인: (그나마) 월급 빼고 다 싫어!!
비정규직: 다 별로네?
직장인으로 몇 년, 프리랜서로 좀 길게, 다시 비정규직 직장인으로...
아르바이트까지 더하면 다양한 분야에서 나름 여러 가지 일을 해본 결과다.
프리랜서를 시작할 때 존경하는 만화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프리랜서는 주민등록번호가 곧 사업자등록번호야."
그때는 드디어 직장에서 벗어났다는 것만 좋았지 내 이름을 걸고 일한다는 것의 무게는 상상도 못 했다.
규칙적인 출퇴근보다 수직적인 직장 문화와 점심도 우르르 같이 가서 먹는 떼거리 문화, 한 달에 3주는 밤 10시가 넘게까지 일하는 야근 문화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던 나는, 좋게 말하면 '문제 사원', 솔직하게 말하면 '돌아이' 내지는 '빌런'이었다. (그 시절의 나를 참아준 상사와 선배, 동료들께 죄송하고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그래서 나는 프리랜서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으면 어디서나 일할 수 있고(실제로는 일을 시작하면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지만), 운이 좋아 일도 빨리 시작했으니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상상을 초월한 낮은 단가와 들쑥날쑥한 수입이었다. 출판 번역은 아무리 빨리해도 최소 3개월에 입금도 대부분 납품 후 빠르면 1개월 뒤여서 모아놓은 돈이 빠르게 소진되었다. 인형 눈알 박기 같은 단기 프로젝트고 뭐고 가리지 않고 해야 했다. 그제야 선배 번역가들이 강의나 다른 고정적인 일을 왜 하는지 이해가 됐다.
그래서 동기들과 "비주류 언어 번역은 돈 잘 버는 남편 있는 여자들이 남 보여주기 좋은 직업인 것 같아"라며 자조 섞인 푸념을 하기도 했다. (물론, 당연히 번역가별 차이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경력이란 것이 쌓여도 번역료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심지어 번역료 인상을 조심스럽게 꺼냈더니, 조심스럽게 일이 끊기기도 했다. 하하하. 대학원 때 교수님이 해주신, 통역이나 번역은 직업적 성격이 누군가에게 선택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연예인과 비슷하다는 말도 절감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연예인처럼 같은 프로젝트를 해도 번역료가 다를 수 있고, 내가 경력이 더 많아도 번역료가 낮을 수 있다. (당연한 건가?)
번역가는 늘 그냥 프리랜서 번역가일 뿐 본인이 창업을 하지 않는 이상 팀장이나 실장, 대표로 진급하는 맛이 없다. 같이 일했던 신입 편집자가 몇 년 뒤 과장이 되고 팀장이 되고 편집장이 되어 사회적 지위나 실력이 단단해지는 것이 보이고 느껴지는 반면, 프리랜서 번역가는 그냥 번역가에 머문다. 실력이 일취월장하지도, 한다고 해도 그게 눈에 띄게 드러나지도 않는다. 나의 경우 비주류 언어이기 때문에 일을 가릴 처지가 되지 않았고 새로운 분야를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큰 도전이자 즐거움이었지만 스트레스도 상당히 컸고 매번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깊게 파고 들어가지 못하고,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늘 수박 겉만 핥다 끝나는 느낌이 들어 내가 내놓은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일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직장에서야 원하지 않아도 일이 쏟아지지만, 프리랜서는 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앞서 말한 늘 새로운 분야를 새롭게 공부해야한다는 중압감도 다 일이 있을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며 학원 선생님이 해주신 말이 있다. “일 못하는 사람과는 술은 같이 마실 수 있어도 일은 같이 안한다.” 정말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소속감, 이것도 무시 못한다. 개개인으로 일하는 번역가들은 이렇다할 모임이 없어 정보 교류도 쉽지 않고 집단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혼자 일하는 자유도 좋지만 동시에 고독감과 고립감도 무시할 수 없다. 내가 다시 직장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 부분이 크게 작용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평생직장이라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지만, 직장에 다니면 일단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고(통장을 잠시 스쳐갈지언정), 때 되면 승진도 된다(물론 매우 힘들지만). 예전에는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만 눈에 들어왔는데 나이를 먹으니 '진급'과 '승진'의 의미도 크게 다가왔다. 그것은 성장이자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연봉이 오르는 것은 물론이고 그만큼 사회적 경험치도 축적되는 것이 눈에 보이니 말이다.
프리랜서와 직장인은 각각 장단점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네이버 검색에 따르면 2024년 8월 기준, 전체 노동자의 38.2%를 차지한다는 비정규직은(여성은 무려 47.3%다.) 프리랜서의 장점인 자유와 직장인의 장점인 매년 오르는 월급과 진급도 없고, 조직에 속해 있으되 묘한 소외감이 느껴지고, 때론 소모품 같다고 생각된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이나 자기 비하일까?
2013년에 방송된(와, 벌써 12년 전이다.) 드라마 <직장의 신>에 등장하는 '슈퍼갑 계약직' 미스김은 그때나 지금이나 찾아보기 어렵다. (공공기관에선 더더욱. "기업 임원도 계약직인데요"라고 하면 화낼거다.)
그래도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은 여러 가지 필요와 이유에서 이고,
이왕 하는 거 최선을 다하지는 않아도 나름 열심히 하려고는 하는데,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월급 루팡'이나 '직장 내 빌런'이 되어 '나이 많은 사람은 일을 잘 안 하려고 해'라는 선입견에 한 표를 더하게 될는지도.
그런데 어쩌지?
월급 루팡이나 직장 내 빌런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다 드니.
(오늘은 한껏 삐뚤어지는 날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