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석 달이 지났을 때였다.
더위도 꺾이고, 새벽엔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을 기운에 쫓겨 해가 뜨는 시간도 늦어지고 있었다.
그날은 어머니가 늦잠을 잤다. 사실 그동안 누적된 피곤함에 괘종시계의 종소리에도 깨질 못했다. 어머니는 시계를 보더니 안절부절 못했다. 급하게 쌀을 씻고 밥솥에 쌀을 안쳤지만, 시간을 맞추기엔 이미 늦었다.
매일 아침 7시가 되면 제사상을 올리고 곡을 했다. 할아버지 장례 이후 매일 벌어지는 광경이었다.
어머니는 거실 창문을 살짝 열고 조심스레 밖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이미 삼베옷을 입고 빈소에서 제사 올릴 채비를 마쳤다. 마침 동네 친척분도 새벽부터 곡(哭)을 하러 오셨다. 아버지는 늦어지는 준비에 안채를 바라보았고,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어머니는 마음이 불안했는지 황급히 과일을 꺼내고 말린 포를 접시에 담았다. 탕국을 급하게 담다가 국그릇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깨진 그릇을 주워 담느라 시간이 조금 더 소요되었다.
삼베옷을 입고 머리에는 수절, 허리에는 요절을 둘렀다. (수절(질)- 여자들이 새끼줄처럼 꼬아서 머리 두건 위에 묶어 놓은 것, 요절(질)은 허리에 두르는 것) 그리고 급하게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여보, 밥을 준비 못했어요. 제가 새벽에 일어났다가 피곤해서 다시 자 버렸네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건만, 아버지는 참지 못했다.
“아니 늦잠을 그렇게 자면 어떡해! 시어른 밥상보다 잠이 더 중요하구먼.”
혀를 끌끌 차며 어머니를 타박했다. 마침 동네 친척분이 함께 곡을 하러 오셨는데, 제사상이 제대로 준비 안 되어 있으니, 더욱 화가 났으리라. 친척분은 요즘 시대에 1년 상을 치루는 것만 해도 대단한데, 어떤 며느리가 시아버지한테 이렇게 하느냐며 화가 난 아버지를 말렸다.
1987년 6월 1일, 노환으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집에서 5일 장을 치루기로 결정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뜻을 묵묵히 따랐다. 집에서 모든 음식을 장만하고 일일이 조문객마다 상을 차려 대접했다. 당시 천여 명의 조문객이 왔다고 한다. 이 장례를 추진한 건 아버지였지만, 어머니의 헌신이 없었다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손님 치루는 것을 돕기 위해 친척들과 동네분들이 많이 오셨다.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 했기에 부엌과 뒷뜰 뿐 아니라 창고에도 공간을 만들어 전을 부쳤다. 마당에서도 조문객을 받아야만 했다. 조문객은 지인과 친척분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모르는 어르신들도 종종 오셨다. 지나가다가 호기심에 밥 한끼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5일 장을 치뤘다. 막상 할아버지를 수안보 선산으로 모시는 날에는 비가 하염없이 내렸다. 지금은 선산 밑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지만, 당시엔 선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큰길에서 내려서 한 시간을 걸어가야 했다. 5일 장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비 오는 날 장례를 치루어야 했던 당시 부모님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장례가 끝이 아니었다. 이후 집에 빈소를 차리고 1년상을 치뤘다.
빈소는 집 안에 있었다. 마당 구석 세 칸으로 된 한약 창고에 마련되었다. 대략 네 평 정도 되는 작은 공간이었다.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과 신위를 모시고 아침마다 제사상을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가 기본적으로 매일 참석했다. 근처에 사는 삼촌과 친척들도 종종 오셨다. 여러 명이 곡을 하다 보니 소리가 제법 컸다. 짧은 기간이면 문제가 없겠지만, 한 달 이상 계속되자 이웃집에서 작게 해달라고 항의를 받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아버지는 엄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고, 어머니는 힘들어도 속으로 삭히며 남편의 뜻에 따랐다.
매일 아침 7시에 제사상을 준비하려면 어머니는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하룻밤 지난 밥을 올리는 건 용납되지 않았다. 반드시 아침에 새로 지은 밥 중에 할아버지 제삿밥부터 먼저 한 그릇을 떠야 했다. 1년상을 치루며 겪어야 했던 어머니의 노고가 얼마나 컸을까.
아버지가 화를 낼 때면, 목소리도 크고 위엄이 있어서 함부로 대항하기가 어려웠다. 훈계가 시작되면 한 두 시간 이어질 때도 있었다. 아버지가 집안의 중심이기도 했고, 아버지의 남다른 책임감이 또 그런 형태로 드러난 듯했다.
노년에는 사랑 표현을 제법 했지만, 내가 어릴 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도 자식들에게도 애정 표현을 하지 않았다. 남자가 애정표현을 하면 남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문화였고, 또한 장남으로서 집안을 건사해야 하는 위치기도 했다. 늘 대화보다는 지시와 명령을 했고, 아이들과 놀아주기보다는 한약방 일을 밤늦게까지 매달렸다. 사실 놀아줄 시간이 없기도 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늘 엄한 아버지로 각인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아버지가 말씀하실 때면 긴장부터 되곤 했다. 사실 어머니도 무뚝뚝한 분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에 비해선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혼난 뒤면 늘 어머니의 품을 찾아갔다.
아버지가 아침에 언성을 높였던 그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약방은 바빴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힘든 하루를 보냈다. 아버지는 대포 한잔하러 나가셨고, 어머니는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밥을 준비했다. 철없던 나는 밥을 먹고는 바로 안방에 들어가 최불암씨가 나오는 수사반장을 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술 한잔하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밥공기를 이불장 깊숙이 넣고 반찬을 보자기로 덮은 작은 상 하나를 안방에 놓아두었다. 늦은 밤이라도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해야만 하는 아버지를 위한 상이었다.
어머니는 설거지를 끝내고 수사반장을 보는 내 옆에 조용히 누웠다. 끙끙 앓으며 나에게 안마를 해 달라고 했다. 드라마를 제대로 못 보기에 잠깐 투덜댔지만, 중학교에 들어간 나는 어머니의 고생과 아픔을 짐작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다리와 허리를 이곳저곳 주무르자, 아들의 안마가 최고라며 비로소 웃는 어머니였다. 잠깐 쉬면서 막내아들의 안마를 받는 것이, 어머니가 고단한 일상 속에서 그나마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갑자기 마당 밖에서 대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채에서 대문까지는 대략 20미터, 정방형의 마당에서 대문까지 나가는 길이 가늘고 길게 툭 나와 있었다. 벨을 누르고, 집안에서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문이 열리는 그런 신식 대문은 아니었다. 밖에서 소리치거나 문을 두드리면, 안에서 뛰어나가 문을 열어주어야 했다.
쿵쿵거리는 소리에 누구인가 싶어 먼저 창문 밖을 보았다. 아버지가 오시기엔 좀 이른 시간이었다.
“여중희! 문 열어라.”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엄마. 아빠가 엄마 이름 부르는데?”
나는 처음 보는 광경에 웃음이 나왔다.
“어머나, 웬일이래? 왜 내 이름을 불러? 동네 부끄럽게.”
어머니와 나는 겉옷을 걸쳐 입고 대문으로 나갔다.
“어이, 중희야! 어서 문 열어.”
큰 소리로 어머니의 이름을 계속 불렀다. 하지만 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발걸음을 재촉해 대문을 열었다. 아버지는 미소를 지으며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머니 곁에 선 아들의 얼굴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중희야.”
“아이구, 왜 이래요? 동네 사람 다 듣게. 사람들이 흉 봐요. 좀 조용히 해요.”
어머니는 무뚝뚝한 어투였다. 그러나 남편의 정감 어린 목소리에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박힌 깊어가는 가을밤. 산들바람이 중년의 부부를 감싸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지나가는 동네 사람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지나갔다.
호남형의 아버지, 불그레한 볼에 오랜만에 미소짓는 그 모습이 중년의 아내에게는 가슴 뛰는 광경이었으리라.
“중희야. 고생이 많다.”
어머니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봤다. 아버지는 어머니 얼굴을 깊숙이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만나서 고생이 많다.”
어머니는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어린 아들에겐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애정 표현이 어색한 탓일까, 아버지는 어머니를 안아주지는 못하셨다. 그냥 아내의 어깨를 다독일 뿐.
어머니는 어깨를 가늘게 흔들며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내를 다독이던 아버지의 어깨도 떨리고 있었다.
늘 강한 아버지, 엄한 아버지였는데, 그날 밤은 참 낯설고도 아련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나는 가을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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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재에 가고 싶어.”
귀를 가까이 대자 아버지가 힘겹게 말씀하셨다. 봉우재는 고향 근처에 아버지가 감나무를 심어 놓은 곳이었다. 그리고 당신이 미리 묘비를 세워놓은 곳이기도 했다. 작은 매형과 누나는 당신을 위해 봉우재에 내려가 사진이라도 찍어오겠다며 급하게 길을 나섰다.
7시30분. 아침 식사가 병실에 들어오고 있었다.
6인실의 병실. 다른 환자들은 다 식사를 시작했다. 아버지 한 분을 제외하고.
수저와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 은은히 풍기는 된장국과 불고기 냄새, 입원실의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나에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아버지는 천천히 눈을 뜨셨다.
황달기가 심해져 눈빛이 누렇다. 나를 서서히 돌아보더니, 손짓을 한다. 밥먹고 오라고.
아, 아버지.
지난 밤부터 나는 아버지의 옛날 일들을 계속 이야기했다.
나는 내일의 태양을 함께 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또 이야기를 들으며 극심한 통증을 조금이나마 잊기를 소망하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의 삶을 아들의 목소리로 다시 들려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당신을 닮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를 또 들려드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