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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마도 아티스트 Dec 21. 2021

쇼팽 발라드 1번, 아마추어의 '로망'

전 가디언 편집장의 아마추어 찬가 '다시 피아노'   

평생 팬 레터라는 건 딱 두 번 써봤다. 첫번째 팬 레터는 고등학교 다닐 때,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쓴 것이었다.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 지금이야 주름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이고, 내가 팬 레터를 썼을 당시에도 50살 언저리였다. 그래도 좋았다. '내일을 향해 쏴라' '스팅' '내츄럴' 같은 영화를 보면서 반해서 로버트 레드포드, 로버트 레드포드,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영화 잡지에 실렸다며,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편지할 수 있다는 주소를 나에게 건네줬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주소가 과연 있었을까 싶기는 한데, 어쨌든 나는 그날 밤 '필 받아서' 영어사전 찾아가며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보낼 팬 레터를 열심히 썼다. 나는 당신의 팬이고, 당신의 영화를 좋아하고, 당신이 한국을 방문하면 좋겠다고 썼다. 내 소개를 한다며 피아노를 좋아한다고도 썼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편지는 부치지 못했다. 다음날 다시 읽어보니 좀 창피했다. 마치 부치지 못한 연애 편지처럼. 


두 번째 팬 레터는 6년 전  '다시, 피아노(Play it again:An Amateur Against the Impossible)'이라는 책 저자인 앨런 러스브리저에게 쓴 것이다. 그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편집국장을 지낸 유명 언론인이다. 1975년 <가디언>에 입사했고, 1995년 기자 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로 편집국장이 되었다. 위키리크스 외교 문건 보도, 머독이 소유했던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폐간을 이끌어낸 해킹 폭로, 에드워드 스노든의 미 국가안보국 감청 폭로 등 세계적 특종을 일궈냈을 뿐 아니라, 스마트폰이 나오기도 전에 <디지털 퍼스트>를 선언하며 저널리즘의 혁신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이 책에서 기자 직업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일에 애정을 드러내는데, 바로 피아노 치는 일이다. 그는 어린 시절 피아노를 배웠고, 지금도 가끔 피아노를 치는 ‘아마추어’이다. 이 책은 그가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직접 연주하겠다고 결심하고, 1년간 이를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다. 영문판 제목 그대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에 도전한 아마추어의 이야기다.

그는 2010년 피아노 캠프에 참가했다가, 택시 기사로 일했던 아마추어 연주자가 쇼팽 발라드 1번을 능숙하게 연주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꼭 직접 연주해 보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곡은 굉장히 어려운 곡이다. 영국에서도 기자는 무척이나 바쁜 직업이다. <가디언>의 편집국장이라면 더더욱. 과연 연습할 시간이 있을까?

그의 비결은 매일 아침 20분씩 연습하는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20분 시간을 내는 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그는 피아노 덕분에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몰입의 즐거움을 누리고 생활의 균형을 되찾았다고 말한다. 아침에 피아노를 연습한 날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상쾌하게 업무에 임할 수 있었다. 급박한 업무로 해외 출장을 갔을 때는 호텔 로비에 놓인 피아노로 연습하기도 했다.

날짜 별로 서술된 이 책에는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가디언> 편집국장의 바쁜 일상이 그려져 더 흥미로웠다. 그는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습한 기간이 편집국장을 맡은 후 가장 바쁜 시기였다고 회고한다. <위키리크스> 외교문건 보도와 <뉴스 오브 더 월드>의 해킹 폭로 보도가 숨가쁘게 진행된다. 그의 일상은 굵직한 사건들과 주요 인사들로 가득한 소용돌이 같지만, 이 와중에도 ‘쇼팽 발라드 1번 프로젝트’는 비록 더딜지언정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알란 러스브리저는 56살 때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처음 치기 시작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이 곡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제 다른 난곡들도 배울 계획을 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를 일찌감치 그만둔 것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알란 러스브리저는 16살 때까지 피아노 레슨을 받다가 그만뒀다. 하지만 그는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했고, 결심한 대로 실천했다.


나는 영국에 있는 후배로부터 이 책을 소개받아, 며칠 동안 잠도 설쳐가며 영문 원서를 읽었다. 전혀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나 역시 기자로 일하고 있고, 피아노를 전공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피아노를 치고 있으니까. 나도 16살 때까지 피아노 레슨을 받다가 그만뒀고, 40이 다 되어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나도 쇼팽 발라드 1번을 치고 있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건 마치 무슨 '운명' 같았다! 

책을 다 읽자마자 앨런 러스브리저에게 팬 레터를 썼다. 나는 한국에서 기자로 일하는 김수현이라고 한다. 나도 당신처럼 피아노를 좋아한다. 나도 지금 쇼팽 발라드 1번을 연습하고 있다. 정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당신의 책을 한국에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번역할 수 있으면 영광이겠다..... 팬레터를 쓰기만 한 게 아니라 이번엔 보내기까지 했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그의 이메일 주소로. (로버트 레드포드 때도 이메일이 있었다면 보냈을지 모르겠다. 클릭 한 번이면 되니까.) 


이메일을 보내고 한동안 답장을 기다렸지만, 답장이 오진 않았다. 그가 내 이메일을 읽었을까? 읽고 그냥 놔둔 걸까? 하도 이메일이 많아 정리하다 지워버렸을까? 그러던 중에 이미 한국의 한 출판사에서 이 책의 판권 계약을 해서 번역 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팬 레터를 다시 읽어보니 역시나 좀 부끄러웠다. 내가 쓴 영어 문장이 어색한 것도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그가 팬 레터를 안 읽었으면 다행이다! 갑작스런 열정이 솟구쳐 팬 레터 쓰고, 번역 해본 경험도 없으면서 겁없이 나서다니, 어쩌려고 그랬니 김수현!  
 
앨런 러스브리저에게 팬 레터를 보내고 1년쯤 후에 이 책의 한국어 번역판이 나왔다. 이걸 내가 어떻게 번역하겠다고 했을까 새삼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책은 한국에서 수십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나처럼 다른 일을 하면서도 피아노를 마음 한 켠에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책이 되었다. 인터넷에서는 앨런 러스브리저의 책을 언급한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글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나는 그동안 다른 곡들도 몇 곡 쳤지만, 아직도 쇼팽 발라드 1번을 붙들고 있다.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 러스브리저도 언급한 그 악명 높은 코다는 아직도 날 괴롭힌다. 너무너무 어렵다. 러스브리저는 '13살 때 이 곡을 쳤는데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고 하는 피아니스트를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책에서 고백했는데, 그 심정이 이해가 간다. 아마추어에겐 '불가능에 도전하는' 수준인데 말이다.  

러스브리저에게 쓴 팬레터는 남아있지 않다. 다시 읽어보고 민망해서 지워버렸다. 그 팬레터에 나도 언젠가는 당신처럼 발라드 1번을 남들 앞에서도 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썼던 것 같다. 그 때가 언제일지, 오기는 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상관없다. 발라드 1번은 내 평생의 친구가 된 느낌이다. 오랫동안 연습을 걸렀다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으면 발라드 1번이 변함없이 나를 반긴다. 오랜만이야, 친구! 손 많이 굳었지? 다시 좀 풀어봐야지? Play It Again! 러스브리저처럼 불가능에 맞서는 아마추어, 그게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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