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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다은 May 19. 2018

12살, 바칼로레아 철학수업 이야기

유토피아는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인가?

12살, 바칼로레아 철학수업 이야기


“유토피아는 한낱 꿈에 불과한 것인가?”

“자유는 주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획득하는 것인가?”

“행복은 단지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예술 작품은 반드시 아름다운가?”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무엇을 비인간적인 행위라 하는가?”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노동을 덜 하는 게, 더 잘 사는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욕망하는 것을 아는가?"
"욕망은 본래 무한한 것인가?"
"우리의 도덕적 확신은 경험에 기초하는 것인가?"


어느 철학자의 고뇌에 찬 질문이 아닙니다. 이제 12살밖에 안 된 저희반 아이들의 학급 과제였다는 것이 믿어지시나요? 사실 아이들에게 ‘바칼로레아’라는 이름의 철학 공책을 나누어주면서, 처음엔 무리한 과제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기 위한 과제로 이런 시도를 해보는 것 자체가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에 각자가 선택한 질문들에 대해 충분히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주고, 가정에서 부모님과도 함께 이 주제로 소통해볼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제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습니다. 평소 책을 많이 읽고 공부 잘하는 아이 뿐만 아니라, 장난꾸러기였던 아이들도 이 질문들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제 나름의 답을 빼곡히 적어온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학생글 1

Q.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저는 철학이 직접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철학이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사전에 나와있는데, 철학은 절대적 진실이기보다는 개인의 사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때문에 영향력이 없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꾸려면 실천을 해야 됩니다.

하지만 철학은 앞서 말했듯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연구만 하는 것이기에

세계에 대한 근본 원리를 알고 있어도 실천을 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더라도

인간은 철학을 최상의 개념으로 존중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이 세상을 직접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킬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12세, 남, 김**)



학생글 2

Q.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구하기 전에 제일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져보고 싶다. 진리는 정말 진리인가? 세상에는 진리라고 믿었던 것이 진리가 아닌 경우가 있다.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고, 그 길을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만 가지 않고 수많은 길로 간다. 그리고 그 길 중 하나는 진리가 된다.

우리가 가는 수만가지의 길 중에서 하나는 진리로 가는 길이지만, 오류는 그 과정에서 진리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일을 한다.

우리가 문구용품 중에 가장 많이 쓰는 포스트잇 사례를 들어보자.

1968년 미국의 세계적 사무용품 기업 3M의 연구원 스펜서 시러는 강력 접착제를 만들려다 실패를 맛보았다. 실수로 접착제 원료를 잘못 배합한 탓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접착제는 일정 수준의 접착력은 유지했지만, 종이에 발라도 스며들지 않고 쉽게 벗겨져 버렸다.

통념상 접착제라는 것은 한 번 붙여놓으면 단단하게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런 기능이 없는 이 접착제는 한 마디로 완전한 실패작이었다.

대개의 연구자들은 실패한 사실을 숨기기에 급급했지만, 실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이런 실패가 언젠가는 쓰일 일이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사내 세미나에서 자신의 실패 사례를 밝혔다.

몇 년 뒤, 이 회사의 아서 프라이 연구원이 교회 성가대에서 대원들이 불러야 할 노래 대목을 기억하기 위해 악보에 끼워넣은 종이 조각이 자꾸만 바닥에 번거로워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실버의 실패 연구를 들은 적이 있는 프라이는 실버의 실패작을 ‘떨어지지 않고 붙여놓을 수 있는 책갈피’를 만드는 데 이용하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바로 1981년부터 판매되기 시작한 ‘포스트잇’이다. 포스트잇은 스카치테이프 등과 함께 3M의 대표적인 상품이 됐고, AP 통신이 20세기 최고의 히트 상품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했을 정도로 성공했다.

이렇게 오류는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에서 얻은 새로운 진리가 되기도 한다.

(12세, 여, 이**)


학생글 3

Q. 예술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논할 수 있는가?  

 예술의 정의는 ‘미적 작품을 형성시키는 인간의 창조 활동’이다. 우리는 사람이 만든 작품도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닌 자연의 미도 개인적으로 인간의 작품만큼, 혹은 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하늘의 색, 꽃, 나무 등 미의 정의에 알맞은 것들이 많으니까, 예술 없이 아름다움에 대하여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2세, 여, 우**)


무엇보다 감동을 받았던 것은, 아이들의 바칼로레아 공책에 남겨주신 부모님들의 코멘트와 진정심이 듬뿍 담긴 응원의 메시지였습니다.


흔히들 독서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가 먼저 책을 가까이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아이와 철학을 나누어주시는 훌륭한 부모님 아래서 아이가 엇나갈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자 못지 않은 사유에 전문적인 근거 자료까지 준비하신 부모님들의 글들도 감동적이었습니다.


A. 예술이라는 것 자체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름다움이 극대화된 것을, 그것을 체계화시킨 것이 예술인 것이다. ‘예술=아름다움’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이보다는 ‘예술 < 아름다움’

이라는 명제가 좀 더 정확하지 않을까?  

길가에 피어있는 들풀은 예술품이 아니지만 그 자체로 아름답다. 화장하지 않은 소녀의 얼굴은 인공적인 화장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신경써서 꾸민 집안 인테리어는 예술은 아니지만 아름답고 하나의 작품과 같다.

그럼 예술은 반드시 아름다움일까? 현대 미술과 포스트 모더니즘 음악은 아름다움이기보다는, 기존의 아름다움의 틀을 오히려 깨뜨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히려 아름다움도 객관화가 될까를 묻고 싶다.


Q. 행복은 단지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아이의 글에 부모님은 아이의 글에 이런 답글을 남겼습니다.


A. 과거의 추억을 통해 행복을 기억하고, 미래의 행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일 거야.
엄마도 **이를 생각하면, 엄마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 일이라고 생각해. 행복해!!



정해진 답, 정답은 없습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아이도, 어른도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요. 한 어머니의 문자 메시지를 받고, 작은 문화가 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엔 무척 어려워 보였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다양한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깊게 생각하고 멀리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울 수 있게 이끌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교육제도부터 베끼고 뜯어고치기

이전에 가정과 학교의 작은 실천으로 문화 만들기


원래 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고등학생들이 대학 입학을 위해 치르는 국가 시험입니다. 1808년 나폴레옹 시대부터 시작된 논술형 시험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을 길러내기 위한 취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해에는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가?’라는 문제가 나왔고, 2013년 정치인의 탈세와 비리가 사회적 문제가 되자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도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짧은 한 문장으로 된 세 개의 질문 중 하나를 골라 무려 4시간동안 논문 형태로 답을 작성하는데요. 이렇게 자라나는 세대에게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데 초점을 맞춘 프랑스 교육은 200년 넘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프랑스에서는 바칼로레아 시험일이 되면 ‘올해는 어떤 철학 문제가 나왔을까’ 기대하며 온 국민이 같이 관심을 기울이고 출제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런 외국의 사례들을 보면 대한민국 교육도 이제는 변화해야 한다며 그들의 문화를 무작정 부러워만 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데요. 그리고 그와 관련한 입시제도부터 뜯어고칠 방법과 절차를 논하기 시작합니다. 정권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다른 핫한 아이템으로 대체되어 비슷한 일을 겪어내고 있겠지만요.


핀란드니 아일랜드니 독일이니, 세계 최고의 교수법을 찾아나서 우리의 지형엔 맞지 않는 그들의 정책을 무작정 모방하는 교육제도는 하나같이 실패해왔습니다. 문화는 만들어가는 것 아닐까요? 외국 교육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제도부터 모방하여 도입하기에 앞서 각 가정과 학교에서의 이런 작은 실천의 시작이 훨씬 의미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교실 경험을 바탕으로 볼 때, 처음엔 조금 어렵고 서툴지 몰라도, 결코 어렵고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유토피아는 한낱 꿈에 불과한가?’라는 주제의 글에서 한 어머님이 하신 말씀처럼요. 유토피아가 객관적인 지표로 측정한다고 하면 불가능일 수도 있지만, 그 노력과 열쇠가 스스로에게 있고 생각을 바꿈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에 누가 만들어주거나 완벽한 길을 정해놓고 맞추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제가 담임을 맡았던 한 남자 아이의 어머님과 면담한 기억이 문득 떠오릅니다. 행복에 대한 자신의 철학일기를 반 친구들 앞에서 발표했던 날, 아이는 하교하는 차 안에서 자신이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부터 신고 있는 운동화까지, 모든 것에 감사, 또 감사한다며 어머님께 자신의 벅찬 마음을 내내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잠들기 전, 아이는 행복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의를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발표한 소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엄마, 오늘 내가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아.
이 학교에 다니게 된 것에 정말 감사해.


그 말을 전해 들었던 저 역시, 교사로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가슴 벅찬 기억이 하나 더해졌습니다.


우리가 배움에 대해 ‘일생에 걸쳐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것’이라고 다시 정의를 내린다면, 시험의 목적도 그에 맞게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시민으로서의 길’에 대해 어릴 때부터 고민하게 될 것이고, 사랑·도전·성공·우정·정의·이상향 등에 대한 자기 나름의 정의를 찾기 위해 많은 질문 거리를 갖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철학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예술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다른 나이 사람들이 하는 것만큼이나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가?”  

                     - 철학자 미셸 드 몽테뉴




▶ 더 자세한 내용은 출간될 책(백다은의 교육상상 Reimagine Education)과
원격연수 티쳐빌 www.teacherville.co.kr 에서 추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해볼 수 있는 활동자료도 함께 제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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