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행_2025.3.26-28

제주의 봄

by 서호

봄이다. 태양이 발기를 시작한다. 흥분한 꽃들은 벗어놓았던 형형색색의 저고리를 주섬주섬 주워 입는다. 꽃들이 입을 벌리고 햇볕이 쏘아대는 빛의 정자를 받아들인다.
전관예우를 갖추자. 봄을 훔친 제주로 떠나야 할 이유다.

제주의 겨울은 하늘이 쏟아놓은 푸른 물감의 바다를 호텔 방에 처박혀 바라보는 게 전부다. 동문시장에서 떠온 고등어와 갈치회 따위의 포장 음식을 먹는다. 렌트도 하지 않고 101번 급행을 타면 2000원에 함덕해수욕장까지 50분 정도 후 도착한다. 직접 운전을 하지 않으니 상하좌우 두리번거리며 사람 구경, 길거리 구경을 마음껏 할 수 있다.
그러나 제주에서 봄은 다르다. 비행깃값도 두 배, 렌트비도 두 배, 숙박료도 덩달아 오른다. 수학여행, 신혼부부, 꽃구경 온 어르신들로 북적인다. 날씨가 좋아서라기보단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방구석 여행은 탈피해야 한다. 3월의 ‘제주’에 바로 서서 부지런히 두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꾹꾹 눌러 담자. 봄을 맘껏 만끽하자. 처음처럼. 그리고 마지막 여행인 듯 자신을 속여보자.
캐리어는 책과 다이어리와 필기구, 국어사전, 속옷 2벌과 양말로 채웠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 산불 피해자 모금에 약간의 돈을 송금하며, 양심의 짐을 덜어냈다.

제주에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어젯밤까지 망설였다. 돈도 돈이지만 두통, 인후통, 기침 증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통이나 인후통은 그렇다 치더라도 기침은 비행기나 기차 안에서 더 잦게 찾아들고 참으려고 하면 할수록 요란하다. 남편에게는 제주행 티켓을 끊어놓았다고 미리 공지해 두었다. 고민 끝에 하루 전에 급히 예약했다.

여행은 삶의 로또다. 설렘으로 가득 찬 복권을 손에 쥔 듯, 떠나기 전 망설임 속에 기대감이 꿈틀거린다. 낯선 일상과 예기치 않은 사건들, 새로운 풍경들은 내 안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끌어낸다. 제주도에 가면 글이 잘 써지는 건 기분 탓일까? 글맛나는 제주, 글 만나러 간다! 누군가 내게 글을 왜 써야 하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상대에게 글을 왜 쓰지 말아야 하냐고 되물을 것이다.
글쓰기는 감정의 궤적을 따라 달리는 항해다. 펜 끝은 나침반이 되어, 상처라는 미지의 섬을 탐험하고, 위로라는 등대는 나아갈 길을 안내한다.



3월 26일 새벽 6시 깨끔하게 단장을 한다. 늦어도 오전 7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오전 8시 35분 비행기였다. 소풍 가기 전날 아이처럼 밤새 뒤척이다 새벽 4시에 잠이 들었다. 감기 증세는 여전하다. 비행기에서 좀 자둬야겠다. 컨디션이 돌아와야 할 텐데 걱정이 앞섰다.
우려와는 달리 제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열은 내렸고, 목의 통증과 기침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몸을 관장하는 것이 마음이라는 말을 믿는다. 좋은 생각을 갖고 시각화하면 상상은 현실이 된다.

버스를 이용해 뚜벅이 탐방을 할지 잠시 고민도 했지만, 이번 여행은 동선의 확장을 통해 사고를 넓히는 것을 목표로 하였어서 ‘돌하루팡’ 렌트가에 2박 3일 일정으로 예약했다. 온라인 플랫폼이 없던 시절에는 40~50만 원 정도의 바가지요금을 쓰곤 했었는데 지금은 2박 3일 일정 기준으로 비수기에는 2~3만 원, 성수기에는 8~10만 원 정도의 렌트비가 책정된다. 최소한의 보험료를 포함한 금액이며, 경차에 해당한다. 서둘러 나오다 보니 아침 식사를 걸렀고, 즉석에서 렌트카를 예약한지라 준비시간이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는 안내 문자를 받았다. 우선 잘 먹어서 찌부러진 감기를 굴복시켜야겠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안전한 여행의 필수는 건강이다. 공항 내에서 아침을 해결해야겠다. 메뉴는 ‘제주 돔베고기 국수’다. 돔베고기 비빔국수는 비빔국수 위에 삶은 제주 돼지고기를 얹어서 함께 먹는 식사 메뉴다. ‘비자림 숲’에 들를 때마다 입구에 있는 ‘비자림 국수’에서 먹던 1인 요리인데 이걸 공항에서 먹다니. 맛은 뒤처지지 않는다.

제주는 렌터카 업체들의 경쟁이 심하고 공항 자체에 개인 렌터카 출입이 제한되어 있으므로 렌터카회사별 픽업 차량이 ‘제주공항->렌터카업체’ 셔틀 서비스가 제공된다. 30분 간격으로 있으니 시간 맞추기 편하다. 단 첫차와 막차 제한 시간이 있고 그 외에는 추가 요금이 발생된다. 차를 인수받아서 해야 할 일은 파손 부위와 연료 탱크 사진을 찍어두는 것이다. 기름은 소비한 만큼 채우거나 반납일에 현금으로 지불할 수 있다.
경차를 선호한다. 기동력이 좋고 주차하기 편하며, 제주는 고속도로가 없고 속도제한 구역이 많으니, 경차를 추천한다.



첫 방문지는 산굼부리였다. 비자림로에 위치한 산굼부리는 공항에서 20KM 정도 거리에 위치해 40분 정도 소요된다. 자차가 없으면 버스로도 갈 수 있다. 입장료가 7,000원인 걸 보니 볼거리가 쏠쏠한 듯하나 웬일인지 주차장이 텅 비었다. 국가 지정 문화재 천연기념물 제263호인 산굼부리. 제주도에는 360여 개의 기생화산이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의 기생화산은 분화구가 없거나 대접을 엎어 놓은 듯 솟아 있지만 산굼부리 분화구는 용암이나 화산재의 분출이 없이 일어나 구멍만 남게 된 마르(Marr) 형으로 전 세계적으로 아주 희귀하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동식물들이 서식한다.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포토존 ‘사슴상’ 이 보이지만 어째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에 휑하니 포크레인만 놓여있다. 알고 보니 정비 중이란다. 영화 ‘연풍연가’ 드라마‘결혼의 여신’ 촬영지라더니? 서운한 마음을 달래려고 ‘구상나무숲’으로 향한다. 구상나무는 암수가 한 그루이며, 어릴 때는 그늘을 좋아하고 커서는 햇빛을 좋아한다. 해발 500~2,000M의 습기가 많은 숲 속에서 자라며, 열매의 색에 따라 검은 구상나무와 붉은 구상나무, 푸른 구상나무로 불린다. 열매의 모양이 꼬부라진 모양, 공처럼 생겨 위로 향해 ‘구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입구부터 편백향이 눈, 코, 입을 점령한다. 천천히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꽃은 보는 사람의 것, 길은 걷는 사람의 것, 책은 읽는 사람의 것, 사랑은 나누는 사람의 것이다. 오직!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짜릿하며, 섹시한 게 바로 숲의 향기가 아닐지! 사람이 없으니, 산책은 포기한다. 갑자기 튀어나올 동물도 무섭고, 사람이 없을 때 사람을 만나는 것도 무섭다.



다음 행선지는 유채꽃이 예쁘다는 성읍민속마을이다. 주차장이 대형 버스로 가득하다. 꽃구경에 나선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제주의 봄은 샛노란 물감이 번지듯 유채꽃을 피워낸다. 어느새 섬 전체가 거대한 미술관이 된다. 햇살을 머금은 유채는 겨울의 묵은 그림자를 지우고 봄을 알린다. 사박사박 유채밭으로 걸어가 나 또한 유채꽃 한 송이가 된다.
여행지에서 나는 세계 최고의 마법사가 된다. 알라딘의 요술램프의 지니, 오즈의 마법사 도로시의 은색 구두, 반지의 제왕의 절대 반지, 해리포터 시리즈의 마법의 지팡이가 부럽지 않다. 어쩌면 최고의 여행지는 머릿속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상상을 통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누구든 될 수 있으니까. 가짜처럼 보이겠지만 그게 진짜 내 모습이다.

성읍민속마을을 한 바퀴 돌면 30~40분 정도가 소요된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마을의 주민이 되어 본다. 물러날 때를 잘 아는 동백. 길가에 떨어진 동백의 사체를 바라본다. 화려한 핏빛 자태가 요염하다. 그녀는 헤프게 한 잎 두 잎 떨구지 않는다. 끝까지 인내하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을 때 툭하고 자신의 모가지를 끊는다. 통째로. 죽는 순간 아니 죽음 후까지 아름답다. 그녀는 살아서는 가지에 매달려 피우고, 죽어서는 땅 위에 붙어 피운다. 동백을 닮아야겠다. 길게 오래 참다가 못 하겠다 싶으면 동백처럼 예쁘게 삶을 마무리해야겠다. 남겨질 사람들을 위하여.



성읍민속마을에서 차량으로 10분쯤 가면 ‘세계 술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다. 술을 마셔야 글을 술술 쓰는 사람이니 술 박물관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관람료는 7,000원이었다. 산굼부리와 같은 가격이니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입장한다. 영롱한 소주병길을 산책한다. 다른 이들은 휙휙 지나가는데 홀로 오랜 탐방을 하고 있다.
제일 먼저 소개된 전통술은 조상 대대로 가문과 집안마다 고유한 비법으로 대물림하여 빚은 것으로 청주, 탁주, 소주로 나뉜다. 청주는 발효가 끝난 술덧에 용수를 박아 넣으면 그 안에 술이 고여 드는데 이때 맑은술을 일컫는다. 제례나 혼례 등 귀한 자리에 놓는다. 빛깔이 탁하고 알코올 성분이 적은 탁주는 그 색깔이 탁하다 하여 탁주, 막 거른 술이라 막걸리, 빛깔이 희다고 백주, 집마다 담근다고 가주, 농가에 필수적인 술이라 농주 등으로 불린다. 마지막으로 소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은 술을 증류하여 20도 이상 높인 술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소주는 소주가 아닌 것이여. ‘소주는 무색, 무향의 술이라......’ 설명되어 있는데 에탄올 냄새는 무엇인가? 옛날에는 향이 없었는데 오늘날 소주가 유독 냄새가 심한 건가?
술을 빚는 횟수에 따라 한 번 빚는 단양주, 두 번 빚는 이양주, 세 번 빚는 삼양주로 나뉜다. 술을 빚으면 빚을수록 술맛이 깊고, 부드러워지니 많이 빚을수록 고급술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절기마다 마시는 절기 술이 있었다. 1월은 세배하고 마시는 세배주와 정월 대보름 마시는 이명주가 있다. 이명주는 ‘귀밝이술’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어릴 적 말귀를 못 알아듣는 친구에게 귀밝이술을 마시라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2월은 머슴의 날인 2월 1일 머슴을 위한 술을 주인이 빚어 주었다. 3월은 삼짇날 술을 빚었다. 4월은 4월 8일 석가탄신일에 빚은 ‘등석주’가 있다. 5월은 모내기와 논매기 시기 종가가 빚은 막걸리와 단오명절, 제사주로 ‘창포주’가 있다. 6월은 유두날 마시는 술이 있는데 선비들이 수려한 계곡 물가를 찾아 풍류를 즐긴 유두연에서 유래되었다. 7월은 7월 15일 백중날 추수를 기다리며 음주가무를 했다. 8월은 햇곡식으로 한가위에 술을 마셨으며, 9월은 중양절인 9월 9일 선비들이 국화전을 부쳐 술을 먹었다. 10월은 기제사를 지내지 않는 5대조 이상의 조상 묘에 올리는 시제술을 마시며 문중의 혈연을 돈독히 하였다. 11월은 동짓날 추수한 곡식으로 술을 마셨다. 12월은 섣달그믐에 새해를 기원하며 제석술을 마셨다.
군인들이 말을 타면서 마시는 잔 ‘마상배’가 있다. 아니 그러면 그것은 음주 운전 아닌가?
‘계영배’라는 절주를 위한 잔은 내게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겉으로 보기엔 일반 술잔과 비슷하나 7부 이상을 채우면 밑바닥 구멍으로 술이 빠져나간다. 이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술 박물관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박물관에 쓰인 글을 발췌했음을 밝혀둔다.


어릴 적 아빠는 술고래였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술을 마시고 들어오셨다. 아빠의 술버릇은 집안의 막내였던 남동생을 으스러지게 끌어안는 것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나는 아빠를 닮아 있었다. 다행히 술주정은 없었다. 술은 내성적인 나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곤 했다. 그것은 용기였고, 희망이었으며, 또 다른 세계로의 출구였다. 지금 내 나이는 마흔에서 쉰으로 향해있다. 달라진 것은 없다. 스스로 알코올 의존증 환자임을 인식하고 있다. 임신하고 출산 후 몸조리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술을 입에 달고 살았다. 사실 남편과 결혼하게 된 것도 술 때문이었다. 낯설었던 친구와 가까워진 것도 술을 마시고 마음을 열었던 덕이었고, 첫 책을 출간한 계기도 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술이 없었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사람들은 내게 술을 끊으라 말하지만, 술이 아니면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술은 거친 삶의 윤활제다. 술이 있어야 웃고, 술이 있어서 울 수 있다. 술은 내게 삶 그 자체다. 언젠가 기안 84가 힘든 일정을 마치고 자취방에 앉아 소주와 참치통조림을 따며 이 맛에 산다고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지친 하루 나를 달래는 건 퇴근 후 마시는 술 한 잔이다. 늘 주변 정리를 해둔다. 숙제는 미리미리. 언제든 술을 마실 준비를 해두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술을 곁에 두니 언제든지 건강을 해칠 수 있고, 생애 마지막 날이 올 수 있음을 알기에 떠난 후 자리를 정돈해 주는 것이다. 하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은 모두 마쳤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 그리고 덤으로 하루를 살고, 마시고 싶은 술을 마신다. 술에 취하면 펑펑 울기도 하는데 그것은 순수하게 기쁨이 넘치는 삶에 대한 환희, 갸륵함이 이유다. 술 좀 그만 마시라는 등의 충고는 사양한다. 스트레스로 인해 마음의 병이 나서 죽던지 술로 인해 몸의 병이 나서 죽던지 인간의 삶은 유한하니까. 내 선택은 후자다. 다만 걸리는 것은 나의 장기들이 쉴 틈 없이 일하도록 굴고 있는 점이다. 안주를 소화하는 위장, 술을 해독하는 간장, 그 돈을 대는 통장에게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고흐의 정원’으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성산읍에 위치해 10분 정도 이동하였다. 관람 동선은 고흐의 정원 미로 산책길로 시작된다. 길을 잃을 수 있다. 실제로 난 길을 잃었고 입구로 돌아가 설명을 다시 듣기 했다. 미로가 끝나면 실내 관람이다. 파충류 체험관이 나온다. 내 키보다 커다란 뱀까지 있었다. 미술관에 웬 파충류냐며 궁금해하신다면 설명해 드린다. 고흐는 어릴 적부터 파충류와 곤충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나만의 정원을 갖는 게 소원이었던 고흐였지만 형편이 좋지 못해 이루지 못했다. 파충류 체험관이 짧게 끝나면 고흐 그림을 3D로 볼 수 있는 AR 증강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앱을 깔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면 입체적으로 보인다.

<밤의 카페> “누군가 내 그림이 성의 없이 빨리 그려졌다고 말하거든 당신이 그림을 성의 없게 본 것이라고 말해 주어라.”

묵직한 슬픔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눈물 알갱이들이 산산이 흩어졌다.

<태오에게> “색채를 통해 무언가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서로 보완해 주는 두 가지 색을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 그 색을 혼합하거나 대조를 이루어서 마음의 신비로운 떨림을 표현하는 일. 얼굴을 어두운 배경에 대비되는 밝은 톤의 광채를 빛나게 해서 어떤 사랑을 표현하는 일. 별을 그려서 희망을 표현하는 일. 석양을 통해 어떤 사람의 열정을 표현하는 일. 이런 건 결코 눈속임이라 할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걸 표현하는 것이니까. 그렇지 않니?”

화가는 색채를 통해 무언가를 보여준다면 글쟁이는 문장을 통해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을 테다. 서로 보완되는 단어와 단어를 결합하여 연인의 사랑을 말하고, 단어와 단어의 대조를 통해 마음의 신비로움과 떨림을 이야기할 수 있겠지. 별을 닮은 문장을 쓰고, 석양을 베껴 사람의 열정을 적어봐야겠다.

고흐 AR아트를 지나면 미디어아트관이 짧게 이어진다.
고흐의 작품 중 <꽃 피는 아몬드 나무>는 자기 조카에게 준 첫 선물이자 생애 마지막 그림이다. 어두운 에너지로 그려냈던 그전 그림들과 달리 희망과 사랑이 가득 담겨있다.

고흐의 정원 앞 유채꽃밭에서 한참을 울었다. 2025년 3월 26일 수요일 새파랗던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 하늘도 나와 함께 울었다. 눈물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는 어떤 사회적 지위도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위 중에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 주겠다.” 이 문장에서 솟아난 것이다.
내 비록 지금은 무명이지만 언젠가 내 글을 통해 나의 마음속에 얼마나 거대한 것들이 숨겨져 있는지 보여주고 싶다. 잠시 눈을 감고 고흐를 만나러 가야겠다. 당신은 멋진 사람이었다고. 우리는 기억한다고. 당신의 영혼과 함께 훌륭한 작품들이 함께 머물러 있다고.



짠 눈물이 짠 바닷바람과 만나 소금 조각이 되기 전에 서둘렀다. 한 시간 넘게 달려 성산일출봉으로 향했다. 제주의 동쪽이 좋다. 오르는 길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린다. 오른쪽은 유료, 왼쪽은 무료다. 오른쪽 길은 한 번쯤은 가볼 만하다. 동쪽 전망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그러나 재방문이라면 왼쪽 길도 추천한다. 충분하다. 출출해진 뱃속에 특별한 간식을 던져주자. 제주 흙 당근 주스를 할짝거리며 함덕 숙소로 향한다.



체크인하고 검색한다. ‘제주 혼밥’ ‘제주 여자 혼밥’ ‘제주 혼술’ ‘함덕 흑돼지’ ‘함덕흑돼지 1인’ ‘함덕흑돼지구이 혼밥’... 혼자 여행하며 힘든 일 중 하나가 1인 식사를 하는 것이다. 제주는 물가도 비싼 데다가 흑돼지구이, 갈치회 같은 메뉴들은 기준이 2인이다. 보통 2인 기준 5~6만 원 +@ 라서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올레 시장이나 동문 시장을 이용한다. 서귀포는 올레 시장이 가깝고 제주시는 동문 시장이 가깝다. 시장에 가면 갈치와 고등어, 광어나 농어, 돔 등 회 포장이 18,000원부터 구매할 수 있다. 딱새우나 해삼, 돌멍게, 해삼 등의 해산물도 10,000원부터 판매한다. 흑돼지구이, 바닷가재 요리, 전복 김밥 같은 로컬 메뉴들도 포장마차에서 1~2만 원에 저렴하게 구매가 가능하다. 시장에 들러 포장한 음식들을 호텔 방이나 루프탑에 올라가 와인이나 소주와 곁들인다. 바다는 거들뿐. 아침은 1층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대체한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시간과 돈, 체력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제주도가 처음인 것처럼! 마지막 여행인 것처럼 여행하기!
검색 창을 한창 서핑하던 중 ‘제주 함덕 흑돼지구이 1인 식사 맛집’을 찾아냈다. 우선 확인을 위해 전화를 한다. “거기 1인 식사 되나요?” 한라산 소주의 적임자는 흑돼지구이다. 네*버 길 찾기를 통해 발길을 옮긴다. 도보로 5분쯤 갔다. ‘돈돼지’라는 간판이 보인다.
“한 명이요.”
머슬머슬 거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검지 손가락을 펴 보인다.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손님 테이블에서 부지런히 고기를 굽고 있었다. 테이블 주인은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 손님이었다. 그녀 앞에 반쯤 남은 소주 한 병과 김치찌개가 놓여있었다. 다행히 나 이외에 혼밥 하는, 고기구이를 먹고, 혼자 술까지 먹는, 여자 손님, 그것도 나보다 어리고 이쁜, 덕분에 용기 한 스푼 얻어 2만 원짜리 흑돼지 1인분과 ‘오름’ 소주를 주문할 수 있었다. 소주 한 병을 비울 즈음 뿔테 안경에 단발머리를 한 30대 초반 정도의 여성이 들어온다. “한 명이요.”
“김치찌개는 서비스이고요. 고기는 구워드립니다.”
적실한 대우가 마음에 들어 1인분 추가를 하고 소주도 1병 더 추가했다.
“회오리주 만들어 드릴까요?”
젊은 직원이 묘기를 부린다. 멋쩍게 웃었다. 순간 입구 쪽에서 긴 생머리에 덜름한 치마를 입은 하얀 피부의 20대 후반 즈음의 여성이 들어온다. “한 명이요.” 사장과 직원들은 익숙한 듯 자리를 안내했다.
“김치찌개는 서비스이고요. 고기는 구워드립니다.”
여성이 주문을 마치자, 테이블 세팅을 마친 남직원이 묻는다.
“회오리주 만들어 드릴까요?”

각기 다른 테이블에 앉은 혼술 하는 여자들을 곁에 두니 든든한 마음과 함께 피식 웃음이 났다. 유튜브를 보는 여자, 핸드폰 게임을 하는 여자, 통화하는 여자 그사이에 다이어리와 모나미 플러스펜을 든 여자가 열심히 끄적거린다. 끄적대는 그녀가 좋아하는 ‘너에게 청혼하지 않을 이유를 못 찾았어.’가 흘러나온다. 어제의 불면을 보상받고, 오늘을 봄으로 꽉 채운 기분이 든다. 이토록 행복할 수가 있을까? 진정 지복이로다.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느낀다. 얼마 전 뉴스에서 요즘 세대들의 코인 노래방(동전을 넣고 노래를 부르는 곳으로 천 원을 넣으면 세 곡 정도를 부를 수 있다) 문화를 다룬 적이 있다. 친구 셋이 노래방에 가서 각기 다른 방을 잡은 후 노래를 부르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함께 해야 ‘우리’였던 그러므로 너와 내가 한 발씩 물러나 배려와 양보를 강요받고 숨죽여 자아를 감추어야 했던 한국의 문화는 닳아간다. 저들에게 ‘너’와 ‘나’ 각자의 색으로 충분히 ‘우리’가 될 수 있음을 배운다.



둘째 날 날이 밝았다. 투명한 빗줄기가 푸른 물감의 바다에 섞인다. 창밖 풍경의 채도가 낮아진다. 바다는 하늘을 흉내 내고 하늘은 바다를 시늉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스미는 새벽 아침, 서둘러 산책 채비를 한다.

서우봉 아래 별다방에 들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함덕 해변을 따라 걸... 걸... 걸어가려던 순간 바지런한 위장과 소장, 대장의 협업은 내장된 그것? 들을 부추긴다. ‘서둘러. 나갈 시간이야.’ 끄응, 순간 대뇌에서 명령을 내린다. 하나, 둘, 하나, 둘... 나는 아닌 척 괄약근을 조이며 숙소를 향해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달리자니 힘이 빠질 것 같고, 천천히 힘을 주며 걷자니 시간이 야속하겠다. 사는 게 이렇다. 뭐든 중간이 어렵다. 적당히가 힘들다. 경제속도를 지키며 한 발 한 발 규칙적으로 움직인다. 세상 어느 군대의 행진보다 정확하다.

사건을 해결하고 나니 온몸이 처지는 것을 느꼈다. 분명 산책 후 첫째 날처럼 둘째 날도 꽉 채우려고 했는데 누가 내 침대에 본드를 발라놨나? ‘총량의 법칙 : 에너지가 그 형태를 바꾸거나 이동하여도 그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전날 새벽 6시부터 늦은 밤까지 투어, 밀린 글쓰기를 했던 게 독이 되었던 걸까? 일행이 있었다면 내 몸을 견인해 끌어냈을 텐데... 발바닥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었다.

느슨한 삶 속에 적당한 조여짐과 긴장감을 위해 떠나온 이곳에서 지체할 틈이 없다. 컨디션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한라산 중턱 ‘관음사’ 한 곳만 들르기로 한다. 혼자 절에 가는 것을 즐긴다. 속세의 시끄러운 마음은 재잘대는 새들에게 던져주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탁해진 마음을 씻어내어 본다. 스님의 기도에 자잘한 소망들을 업혀본다. 내가 바라는 일들이 피어오르는 향과 함께 이루어 지기를...

머리가 허리춤까지 오는 여자들은 머리 감기로 시간을 탕진한다. 이럴 줄 알고 모자 하나를 준비했는데 그 모자는 생일 선물로 구*에서 60만 원 가까이 산 명품이었으므로 아끼고 아끼다 여행이랍시고 챙겼던 것이다.
목포에는 ‘갈치’가 있었고 순천에는 ‘길치’가 있지 않았던가. 어째 조용하다 했더니 가까운 거리였음에도 돌고 돌아 한 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다. 막 내리려고 하니 장대비가 쏟아졌다. 한여름 장마철이 아니라면 웬만해서는 우산도 챙기지 않고 그대로 비를 맞는 편인데... 오늘은 하필 비싼 모자를 쓰고 오는 바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관음사 주변 우산을 팔 만한 상가는 보이지 않았다. 비옷을 입은 사람들, 우산을 사람 수 대로 쓰는 사람들이 하나, 두울 내렸다. 그냥 내려갈까? 어릴 적 엄마의 도시락에 수저가 들어있지 않으면 밥을 먹지 못하고 돌아오던 나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잘 못하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앉아 있다가 ‘찻집’을 향했다. “여기 우산을 살만한 곳이 있나요?” 사장님께서 친절하게 우산을 빌려주셨다.

관음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작아서 놀랐다. 두 손을 합장하고 기도를 시작했다. 원래 내 기도는 그런 것이었다. 사회, 가족, 나를 위한 거창한 것들 말이다. 그러나 오늘의 기도는 솔직했다. ‘부처님 이제 사회고 가족이고 나발이고 제 글들 좀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해 주세요. 제발 제가 좋은 작가가 되고, 노벨상도 타게 해 주세요.’ 기도가 끝나자 밀려오는 죄책감에 그만 항복하고 기도를 수정했다. ‘아 죄송해요. 부처님, 다시 할게요. 우선 지금 우리나라를 뒤덮은 산불을 꺼지게 해 주세요. 가족들이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제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도록 해주세요. 좋은 작가가 되고, 노벨상도 타게...’ 기도를 수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했다.

몇 걸음을 돌아가니 내 머리만 한 돌이 작은 탑에 올려져 있었고 그 앞에 ‘소원을 들어주는 돌’이라고 사용법이 설명되어 있었다. 별똥별과 산타할아버지, 외계인, 신을 믿는 사람이 그냥 지나칠 순 없었다. ‘참나, 뭐 이런 유치한 게 있나?’ 하는 표정 안에 믿는 마음을 꼭꼭 숨겼다.
<사용 방법>
1. 돌을 그냥 들어본다. 2. 온 마음을 다해 소원을 빈다. 3. 다시 돌을 들어본다.
소원을 빈 후에 돌이 들어지면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지만, 소원을 빈 후에 돌이 아주 무겁거나 들리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시키는 대로 돌을 들어 보니 쉽게 돌이 들렸다. 그리고서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온 마음을 다해 소원을 빌었다. 다시 한 걸음 다가가 돌아래 손을 밀어 넣었다.
‘헉!’ 그런데 돌이 들리지 않았다. 토르의 망치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너무 놀란 나는 뒷걸음치다가 나자빠졌다. 내 소원이 이루어지려나?
두근대는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찻집에 우산을 돌려드리고 감사한 마음에 침향 쌍화차를 주문했다. 대추, 잣, 해바라기 씨앗이 둥둥 떠있었다. 침향과 감초의 향이 좋았다. 창밖엔 비가 내리고 행복이 밀려와 왈칵 눈물이 났다.

셋째 날 서둘러 공항으로 향한다. 가슴 안에 작은 씨앗을 심고서! 식기 전에 써야 할 것들이 있다.

헤르만 헤세는 ‘행복은 권리가 아닌 의무’라 했다. 행복은 의무다. 행복은 누가 나에게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하는 것이다. 살아가며 행복의 의무를 실천하며 살아가야겠다.
이렇게 행복한 유배를 마친다. 굿바이 나의 글 마루 제주!



-마치며
제주는 나의 글 마루다. 큰방에서 작은방, 작은방에서 화장실, 화장실에서 현관으로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가려면 반드시 마루를 거쳐야 하듯 삶과 글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마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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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