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를 소유하다
어제는 오랜만에 오후 4시 30분에 퇴근했다. 남편의 배려였다.
해를 보면서 퇴근한 게 몇 년 만인가?
신나는 마음에 백화점으로 향했다. 며칠 전 부부 동반 모임에서 다들 정장에 핸드백인데 나만 배낭에 무릎 나온 청바지와 빛바랜 면티를 입었기 때문은 아니다.
도착해 보니 주차장 진입로가 막혀 있었다. 후문 쪽도 막혀 있었다. 다시 입구 쪽으로 가보니 ‘정기 휴일’ 이란 팻말이 덩그러니 붙어있었다.
차인표 배우가 신애라 님과 결혼하고 몇 년 후 노래방에 갔더니 신곡은 모르고 처녀 때 노래만 흥얼거렸다더니…. 내가 그 꼴인가? 옷 사러 백화점 가본 지도 참 오래다. 여기는 월요일이 쉬는 날이구나.
남편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다. “엘에프로 가.”
귀찮은 마음에 집으로 돌아갔다. 도착하고 얼마 안 되어 둘째 녀석이 들어왔다.
“어? 엄마가 이 시간에 왜 있어?”
몇 년 만에 해있는 시각에 엄마를 본 아이의 숨길 수 없는 찐 미소. 들켰다. 요놈!
다음날, 남편은 어제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다시 오후 4시에 가게로 왔다. 의아한 표정을 짓자, 들어가란다. 나는 집으로 가려다 어제 못한 쇼핑을 위해 백화점으로 향했다. ‘영캐주얼 매장’ 고민할 것도 없이 직진. ‘**이크’에 들러 색감과 질감이 훌륭한 면티 3장을 골랐다.
“계산이요.”
내가 체크카드를 내밀자, 직원은 비밀번호를 물었다. 카드사용에 비번이라니.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시치미를 떼며 5만 원 이상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한단다. 계좌이체 하려는 거 다 아는데…. 거짓말쟁이. 모른체 넘어갔다. 한 줌의 인류애가 오늘도 상실되는구나.
‘무엇을 더 살까?’ 생각하며 1층으로 내려왔다. 진한 향수 냄새와 함께 새로 나온 디자인의 가방과 신발들이 아우성쳤다. 엘리베이터 앞 행사장에는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작은 손거울 앞에서 선글라스를 썼다가 벗었다 하며 고개를 좌우로 돌려댔다.
뭘 사지? 뭐가 필요하지? 됐다.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 가진 여자. 만족한 삶이라 백화점에 가도 살 것이 없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서점이나 다이소, 아트박스에 가면 달랐으려나? 픕.
행복이 뭘까? 굳이 무언가를 더 소유하지 않아도, 불필요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 오히려 마음이 더 풍요로워진다. 해가 쨍한 오후에 일찍 퇴근하는 발걸음, 엄마를 보고 환하게 웃는 아이의 얼굴, 엉뚱하게 문 닫힌 백화점 앞에서 헛웃음 짓게 되는 소소한 해프닝들까지. 이 모든 순간이 그저 '나답게' 흘러가는 삶의 한 조각이라는 걸 인정하는 것. 애써 밖에서 찾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 존재하는 충만함. 어쩌면 행복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달린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