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살아내야겠지
서른 한살, 늦은 나이라고 생각할 때 7년다닌 회사를 나와 유학을 떠났다. 한번도 안가 본 유럽, 그안에 작은 나라 네델란드.
매일이 생존의 문제였다.
날씨부터 에러였다. 8월 한여름에 도착했는데 닭살 돋게 추웠다. 매 끼니가 걱정이었다. 문자 그대로 춥고 배고팠다. 잘 곳을 정하는 것, 식사 해결이 급했다. 환생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것들을 내 스스로 갖춰 나가야 했기에. 인터넷과 전화를 개통하는 것 모든 것이 생존 미션이었다. 은행구좌, 전화, 인터넷 그리고 거주권까지 네델란드의 사회라는 시스템에 접속하는데만 두어달이 흘렀다. 마치 내가 기어들어가 잠잘 동굴을 찾고 땔감을 주어올 곳과 불을 피워 죽지않을 정도만 알게 된 수준이었다. 다행히 네델란드 원시인으로 환생할때는 전생에 벌어둔 돈이 있었지만.
육신의 생존과 시스템접속의 단계를 지나자 ‘이방인의 삶’이라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우편물이 올때마다 불안이 엄습했다. 더치어 Dutch가 독일어인줄 알았으나 네델란드어였다. 오직 영어로 된 석사학위코스만 믿고 떠났기에 이방인은 어느 나라인지도 모르는 곳에서 방황했다. 내게 편지올 친구도 친척도 없는 그곳에 더치어로 된 우편은 늘 중요한 것이었다. 세금, 거주권, 경고나 안내 등등. 호의인지 질책인지 알지 못하니 집 앞에 온 봉투만 봐도 두근두근거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번역이 되는 어플이 있지 않았기에 한글자 한글자 워드로 쳐서 구글 번역기로 대략 내용만 파악하는 몇 십분 남짓은 살생부를 여는 기분이었다.
영어로 된 대학원 과정은 하루하루가 전투였다. 정확히는 매일 매일 얻어터지고 지는 전투. 아무도 나를 때리지 않지만 나는 얻어터지고 있었다. 학위를 마치니 학교는 그나마 울타리가 있는 놀이터라는 것을 깨달았다. 졸업을 하고 외국인 노동자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 자본주의의 칼을 받아들고 전투에 투입되었다. 내가 전투라고 생각한 유학생의 삶은 내 돈을 내고 훈련받는 스파링이었던 것이다. 남의 돈을 받는 순간 연습게임은 없어진다. 주어진 무기를 들고 일 인분 이상을 해야 다음판을 깰수있는 전투 그 자체였다. 게임의 한판 이기면 보너스 점수에 맞춰 목숨이 늘어나듯, 6개월에 한번씩 체류권을 연장시켰다. 이벨류에이션은 피가 말렸다. 처음에는 백방으로 피를 구하고 수혈을 받으려 노력했으나 지쳐갔다 세네번 연장후에는 언젠가 game over가 될 것을 받아들였다. 아니 게임을 누가 끝내 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거주한지 4,5년쯤 되니 주변에는 영주권과 시민권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외국인이 한국에 귀화하는 것과 비슷한 과정이있다. 귀화시험에는 더치어 언어 시험을 통과해야한다. 네델란드에 오기 전까지는 세상에 있는 언어라고도 생각지도 못한 그 언어 말이다. 몇몇은 그렇게 시민권을 얻고 나는 내 나라로 돌아왔다. 학위를 얻었고, 쓸만한 경력과 유로화를 벌어왔으니 생존하여 돌아온 것이다.
이제 마흔 다섯, 더 이상 생존의 문제는 없어졌을까?
아니다 나는 아직도 매일 사투를 벌인다. 마흔중반의 생존은 결이 서른의 그것과 결이 좀 다를뿐. 그때의 생존은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고 팔을 펼칠 곳을 찾아야하는 생존이었다면 이제는 지려는 것을 붙잡고 견디어 내는 생존에 접어들었다. 적이 먼저 쓰러지길 기다려야하는 생존, 바닥을 먼저 보이지 말아야하는 생존, 자신의 무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고 겁을 주는 생존, 권위라는 울타리를 치고 얕아도 깊어 보이는 물 - 교양이라는- 해자를 파고 밤새 보초를 서야하는 초조한 생존이다. 또 한명의 동료가 떠났다. 떠난 그가 없는 자리에서 나는 또 생존, 해/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