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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Aug 22. 2024

#2. 10월 25일, 그날의 일

*소설입니다.



  10월의 가을바람에 눈물도 말라 버렸다. 오전 11시 30분이다. 구석진 벤치에도 햇살이 비췄다. 무릎에 힘주고 일어섰다. 점심 준비를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냉장고를 열고 반쪽짜리 당근, 물기 빠진 양파, 유통기한이 임박한 햄을 썰어 넣고 마구 볶아댔다. 30시간이 다 된 전기밥솥의 밥을 넣고 다시 마구 볶아댔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때린 것이 더욱 미안해졌다.


오전의 실시간 화상수업을 마친 아들이 주방으로 왔다. 눈치를 살피는 눈치다. 아들이 좋아하는 볶음밥을 예쁜 그릇에 담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화해의 제스처였다. 인생이 너덜너덜해진 후 어떤 싸움도 버거웠기에 아들과의 감정싸움 같은 것은 빨리 마무리 짓고 싶었다. 숟가락을 챙겨주니 서준이 말을 꺼냈다.


“25일에 체험학습 신청할 거지?”

“아니.”


“왜?”

서준이가 무표정으로 쳐다봤다.


“코로나 때문에 어차피 못 가.”

“그래도.”


“굳이?”

아무 말 없이 아들은 밥 한술을 떴다.


신청서를 내라는 말에 한숨이 올라왔다. 담임이랑 몇 마디 말조차 섞고 싶지 않을 만큼 누구와도 소통하고 싶지 않은 상태였다.

   

“화상 수업인데 그냥 들어.”

“···.”


“신청 사유에 뭐라 그래?”

아버지 죽은 날이라고 써!”


서준이는 밥숟가락을 식탁 위에 내리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밥 다 먹을 때까지만 입 다물고 있을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서준이가 체험학습을 신청하려는 목적은 ‘심신 미약’이다. 2018년 그날 이후부터 매년 10월 25일만 되면 예약이라도 한 듯 아팠다. 아픈 영혼이 몸을 가지고 노는 느낌이었다.


 그날을 떠올리니 나 역시 숨쉬기가 힘들었다. 다시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무작정 공원과 연결된 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이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한달음에 중턱에 올랐다. 숨이 차올라 벤치에 기대앉았다. 잡념을 없애려고 해도 또, 기억은 그날 그 장소로 가 있었다.



서준 아빠와 커피숍에 마주 앉아 있다.  

“찍어.”

나는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이거 원한 거 아니었어?”

나는 가시를 세웠다.   


“조금만 시간을 달라고 했잖아.”

“숙려기간 중에도 그년이랑 놀아났잖아.”


그는 할 말이 없어야 했다. 근데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어떤 핑계도 대지 않는 모습이 더 괘씸했다.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더 말 필요 없고 그냥 찍어.”


내가 건네준 그의 도장을 그는 체념한 듯 손에 쥐었다. 준비해 온 말과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입 밖으로 나왔다.   


“당분간 서준이에게는 비밀이야. 애가 전화하면 무조건 받아. 양육비는 바람피운 죗값이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보내. 나 죽인 걸로도 모자라 아들까지 죽이고 싶지 않으면. 분명히 말했어. 돈이 모자라면 몸을 팔아서라도 보내. 알겠어!”


굳어진 그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나도 하나만 얘기하자. 당분간 어머니한테는 비밀로 해줘.”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낯짝이 있는 놈인지 궁금했다.

“나더러 계속 당신 부인 역할을 하란 거야? 미친 거 아니야?”

“서준이 엄마 역할을 하란 거야.”

“정녕 양심도 없구나.”


그가 큰 숨을 참으며 말했다.

“당분간이라고 했잖아. 나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뭘 정리해? 도장 찍는 게 정리야.”


“···.”

“그년 정리하는 건 아닐 테고.”

마지막까지 미련인지 마지막 말에 내가 우스워졌다.


“그만하자.”

그는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서류는 다음 주 월요일 아침 9시에 낼 거니 그런 줄 알아.”

또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인데, 당신 사망보험금은 지금처럼 법정대리인으로 해놔. 설마 그년 앞으로 해놓을 건 아니지? 혹시라도 눈깔이 뒤집혀서 그년이랑 결혼에 혼인신고까지 하게 되면 서준이 이름으로 전액 돌려놔. 아들이라면 끔찍하니 그 정도는 해주는 게 도리지.”


“진짜 당신이란 여자는 돈이 세상의 전부지?”

“당신은 그런 되지도 않는 사랑이 세상의 전부야? 최소한 돈은 배신은 안 해.”


내 말의 시작과 끝은 언제나 돈이었다.


“하~ 바늘구멍만큼도 숨 쉴 틈을 안 줬어. 아들한테는 그러지 마.”

이혼이 내 탓인 양 돌리는 말투에 진절머리가 쳐졌다.


“그래. 난 그런 여자야!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데!”

한 푼 두 푼에도 벌벌 떨게 만든 건 남편이었기에 나는 돈 문제에서만큼은 당당했다.


“그만하자.”


마지막은 점잖게 끝내려 했는데 또 이리 흥분하고야 말았다. 비난과 힐난이 일상이 되다 보니 지치지도 않았다.


“집에 있는 당신 짐 지금 다 챙겨가. 한 시간 줄 테니!”

“오늘 말고 다음에.”


매사 미루는 게 지긋지긋했다.


“당신 흔적 꼴도 보기 싫으니까 애 오기 전에 챙겨서 나가!”

“지금은 좀 바빠.”

“안 가져가면 다 버릴 테니 그런 줄 알아!”


그는 단념한 듯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눈앞에서 그를 치워버리니 속이 시원했다.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속이 쓰라렸다. 이혼서류를 접어 에코백에 넣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갔다.  


“제일 빠른 걸로 주세요.”


나는 받아 든 티켓에 적힌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첫 장면부터 끔찍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난 인간이 얼마만큼 인간에게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공감했다. 영화는 끔찍하게 시작해서 끔찍하게 끝이 났다. 사람들이 다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으로 나왔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맨 뒤 구석 자리로 갔다. 엘리베이터는 5층 키즈 아동복 쇼핑코너에서 잠시 섰다. 30대 후반 아줌마 2명이 탔다. 둘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떡해. 마음 초등학교 삼거리에서 큰 사고 났었나 봐.”

“왜? 무슨 일이야?”


모자 쓴 여자가 자신이 받은 카톡 사진을 긴 머리 여자에게 보여주었다. 확대해서 보던 그 카톡 사진이 내 눈에도 순간 스쳤다.


“어머! 어떡해.”

긴 머리 여자는 입을 틀어막으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이고. 옆에 엄마랑 아들인가 봐. 부인이랑 자식은 어찌 살라고.”

둘의 골치 아픈 대화는 계속되었다.


“하교 시간이라 학원 차에, 구급차에 학교 앞에 난리가 났었나 봐. 진호 아빠 말이 이미 남자는 현장에서 피를 많이 흘렸다던데···.”


나는 그제야 에코백에서 휴대폰을 꺼내보았다. 서준 아빠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17통이 찍혀있었다.


‘이 인간, 또 뭐를 못 찾아서 전화를···.’


순간 카톡 사진 속 고개 숙인 아이의 가방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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