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이는 남편의 장례식 이후, 정신을 놓고 사는 나를 대신해 우리 집에 석 달 가까이 살면서 나와 서준이를 돌봐주었다. 밥을 차려주는 것 외에 남편의 짐 정리에, 이사와 서준이 전학까지 모두 알아서 처리해 주었다. 동생이 집안 살림을 챙겨주어 나와 서준이는 늦지 않게 정신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서준이는 남편의 사고 이후 심한 불안을 겪다가 최근에서야 조금 좋아졌다. 나 역시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다가 지금은 약을 먹으면 그래도 견딜 만했다. 다 수진이 덕이었다.
수진이는 석 달을 돌봐 주고도 미덥지 않았는지 아예 본인 집 근처로 우리를 이사시켰다. 씩씩하게 새 출발 하라는 의미에서 새 아파트로 말이다. 그 덕에 서준이는 개교한 초등학교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초반에는 수진이가 서준이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귈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애들을 모아서 떡볶이도 만들어주고 키즈카페도 데리고 다니면서 말이다. 그래서인지 서준이가 이모를 많이 좋아했다.
“25일에는 내가 서준이 책임질게. 언니는 집에 있을 거야?”
“아니, 알바하려고.”
“무슨 알바?”
“알아봐야지.”
“응. 근데 무리는 하지 말고.”
수진이가 예전에 내가 음식점 알바를 하다가 홀에서 심하게 구토를 한 일이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었다.
“알았어. 다른 종류 일 알아볼게. 저기, 너 혹시?”
“혹시 뭐?”
“서준 아빠 사고 난 날, 서준이랑 병원에 갔다던 그 여자.”
“아, 그분. 왜?
“혹시 전화번호라도 남아 있을까?”
“음···. 그때 형부 폰으로 전화받았어.”
“아, 그랬구나.”
“근데 그 여자는 왜?”
“갑자기 생각나서.”
나는 사실 그 여자를 자주 생각했다. 내 우울증에 그 여자도 큰 몫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왜 만나려고? 아이고, 우리 언니. 또 형부 생각 많이 나나 보네.”
“끊는다.”
수진이는 내가 그녀를 만나 남편의 임종을 지켜주고, 아이를 데리고 있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아니었다. 나는 그녀는 내 남편 없이 지금 잘 사는지, 어떤 외모와 성격을 가진 여자인지 그게 궁금했다. 대로 한복판에서 모르는 이가 아내로 착각할 정도로 울었다면 보통 스쳐 가는 인연은 아니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 죽은 지 3년이 되는 지금까지 남편의 마지막 사랑이자 임종을 지킨 그 여자가 문득문득 나를 괴롭혔다.
그 여자만 없었어도 남편이 죽었을까?
내가 그날 이혼을 말하지 않았으면 남편은 살아있었겠지.
모든 게 후회스러웠다.
내가 이혼을 결심한 그 순간까지 나는 그녀의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했다. 그 여자는 닉네임으로만 남편과 소통했고 절대 본명을 들키지 않았다. 그 둘은 아주 은밀했다. 내가 고된 육아와 쪼달리는 살림살이가 괴로워 거실에서 술 한잔하고 곯아떨어지는 밤이면 둘은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자다가 목이 말라 주방으로 가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남편 서재에서 나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내가 그리도 원했던 다정한 공감의 말, 따뜻한 위로의 말, 행복이 스며든 웃음소리를 나는 들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성은 잃었지만 냉정은 유지했다.
번뜩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다시 수진에게 전화했다.
“어, 왜?”
“너 혹시 짐 정리하다가 형부 휴대폰 못 봤어?”
“안 그래도 그게 안 보이더라고. 찾다 찾다가 못 찾았어.”
그날 병원에 갔을 때 서준이는 아빠의 휴대폰을 꼭 쥐고 있었다.
“혹시 서준이한테 물어봤어?”
“자기도 기억에 없대.”
“···.”
“거기 뭐 중요한 거 있었어?”
“아니야. 알았어.”
혹시나 서준이가 아빠의 외도를 뒤늦게 눈치챘을까 싶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겠지? 카톡도 읽고 바로 삭제해 버리는 사람인데... 휴대폰에 뭘 남겨놨을 리 없어. 아들이 수시로 게임을 한다고 가지고 가는 폰에.’
나는 잡념을 몰아내고 산을 내려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침 서준이가 방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나왔다.
“너 혹시 아빠 휴대폰 가지고 있어?”
“뭐?”
“마지막에 네가 쥐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없어. 이제 와서 그건 또 왜 찾아!”
버럭 신경질을 냈다.
“너는 엄마가 말만 하면 신경질부터 내!”
“엄마가 신경질 나는 말만 하니까 그러지!”
“아우, 됐다. 현장 체험학습신청서는 담임선생님한테 문자로 보낼 테니까 너는 그날 이모 집으로 가.”
서준은 대답도 없이 다시 물 한 컵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본인의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안방으로 들어와 등쿠션에 몸을 기댔다. 에너지가 너무 소진되는 하루였다. 쓰러져 자고 싶었다. 하지만 습관처럼 휴대폰을 집어 들고 알바 앱을 실행시켰다. 매번 지원하기까지 버튼 앞에서 멈추곤 했다. 사실, 여러 번 용기를 내어 사회로 나가보긴 했지만 하루도 못 채우고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감이 더욱 없어졌다. 그렇지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일을 하러 나가지 못하더라도 알바할 거리라도 구경해야지, 그것조차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밀려와 견디기 힘들었다.
사고가 난 지 3년이 다 되었는데도 방에서 한 발짝 나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이젠 어쩔 수 없이 걸음마부터 시작해야 했다. 나로 인해 죽은 남편. 그가 마지막 선물로 주고 간 그 목숨값을 갉아먹으면서 사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내가 버러지 같았다. 남편과 맞바꾼, 아이의 아버지와 맞바꾼 새 아파트에서 흰쌀밥을 목구멍으로 삼키는 나란 여자에게 구역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돈밖에 모르는 년.’
당장 생활비가 모자라 시달리면서도 보험은 꼬박꼬박 내는 남편에게 매달 말일이면 타박했었다. 서준이 학원 보낼 돈도 없는데 무슨 보험에 그리 가입하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 남편은 사람 일 모르는 거라면서 보험은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정말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