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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Aug 29. 2024

#5. 우울한 가장

*소설입니다.



어느덧 12월.

우울증 환자에게 힘든 계절이다. 외벌이였던 가정에서, 가장인 남편을 잃는다는 것은 한 가닥 거미줄에 매달린 낙엽이 된 기분이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이리저리 뱅글뱅글 돌다가 낙하할 운명이었다. 그 불안함을 위태롭게 견뎌야 했다.



하지만 나는 남편 잃은 불쌍한 여인이기 이전에 한 아이의 엄마였다. 더 큰 위기가 닥치기 전에 불안을 이겨야 했다. 일할 수 없는 몸인 것 같아 내가 미웠다. 그럼에도 아이의 유일한 보호자가 나라는 생각에 일어나야 했다.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숨 막히게 막막했다. 그 기분을 흐느적거리는 온몸으로 느껴야 했다. 이 기분을 미리 알았으면 그때 이혼을 얘기할 수 있었을까?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현실로 와닿았다면 남편의 바람을 한 번쯤은 눈감아 주었을까?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숱한 여인네들처럼 말이다.


그 여인들이 목구멍으로 넘겨야 할 구질구질한 밥 한 숟가락 앞에서 얼마나 찢기고 밟혔을지 감히 상상해 보았다. 배부른 소크라테스나 할 법한 생각이었다. 그래도 돈 벌어오는 남편이 있는 그 여인네들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새 아파트 뜯어먹고 살 것도 아니고 생활비로 남겨두었던 보험금도 3년을 야금야금 썼더니 이제 거의 바닥이 보였다. 고상한 망상은 집어치우고 가장으로서의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4년제 대졸인 여자가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었기로서니 이리 할 일이 없는지 막막함이 밀려왔다. 서비스업에 취약한 내 병이 문제인지, 10년 공백이 문제인지, 코로나로 침체된 경기 탓인지 내가 할 만한 일자리를 찾기는 힘들었다.


번듯한 경력자들도 임금이 깎이거나 쫓겨났고 자영업자들은 사람 구경하기 힘들다며 피를 토하는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일자리가 턱 하니 찾아온다는 게 오히려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때 누군가 당신 정도면 충분하다고 손짓했다.        


<구인공고>
- 급구(내일부터 가능)  
- 단순 업무/초보 가능/나이 제한 없음  
- 사는 지역, 전화번호 남기면 연락드림  
- 담당자 : 개미인력 김한수 (010-3456-78**)     


내가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하지만 나는 께름칙한 마음에 쉽게 문자를 보내지 못했다. 개미인력을 클릭하니 회사와 사람을 연결해 주는 인력 송출회사였다. 이런저런 수많은 알바 공고를 올려놓은 걸 확인했다.


다들 일이 없어 죽겠다는 코로나 시국에 수많은 사람들을 모집하는 이 회사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하는 곳이지? 혹시?’


나는 염전의 노동자들, 알바를 가장한 사이비 종교 등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알바 지원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수진이와 상의해 볼 참이었다. 커피를 내려놓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서준이 방에서는 줌 수업이 한창인 듯 소리가 새어 나왔다. 휴대폰을 집어 드는 순간 ‘카톡 왔숑’이라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방에 있는 아들이었다.


“지금 거실?”

“어. 왜?”

“책장. 핑크색 책. 방으로.”

“지금 필요해?”

발표. 다음 순서.”

“알겠어.”


나는 책장에서 화사한 딥 핑크색의 작고 얇은 책을 꺼냈다. ‘사진과 사람, 그리고 사랑’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고 아래에 작게 ‘김서준 지음’이라고 적혀있었다.

그때 다시 카톡이 울렸다.


“ㅃㄹㅃㄹ"


아들이 재촉했다. 넘겨보고 싶은 충동을 뒤로 미룬 채 아들 방 문을 열고 노트북 내장카메라에 얼굴이 잡히지 않게 전해주었다.


다시 거실 소파로 돌아와서 앉았다. 수진이에게 전화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해 봐. 가 보고 아님 말고.”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나이 마흔이 넘었는데 뭘 그리 겁을 내는지 수진이 말처럼 그냥 일단 해보고 나서 낌새가 이상하면 그만두어도 늦지 않았다.


무턱대고 김한수 씨에게 문자를 보냈다. 보내면 바로 답변이 올 줄 알았는데 답이 없었다. 아무나 상관없는 단순 업무에서조차 나는 쓸모없다는 건가? 다시 침몰하는 기분에 휩싸였다.


꼬깃꼬깃해진 자존심에 더는 상처를 주기 싫어서 아무 일 없다는 듯 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기다리던 문자 알림 소리가 들렸다.  


“단순 포장 업무 / 8시 집합 / 주민등록등본 지참.”


깔끔했다. 이력서도 필요 없다. 면접도 필요 없다. 주민등록번호만 넘기면 일할 수 있는 곳 같았다. 단 하루도 가능하니 부담도 없었다. 묻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묻지 않았다. 그의 문자에선 나 바쁘니 답문자 보내지 말라는 것이 느껴졌다. 김한수 씨의 불친절한 문자는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주민등록등본 인터넷발급을 위해 정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내 이름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나는 세대주였다. 자녀가 한 명 있는 2인 가구의 세대주였다. 미성년 자녀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었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태극문양은 대한민국에서 너에게 주는 의무이자 피할 수 없는 진실임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그리고는 그건 미래의 일이 아닌 현재 시점 기준으로 사실이 확실하다며 정부시점확인센터에서는 '진본' 도장을 콱 박아주었다. 우측 상단에서도 이 내용은 원본 내용과 틀림없음을 증명한다고 강조해서 말했다. 짓누르는 삶의 무게를 다시금 확인하게 되어 숨이 막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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