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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수광부 Jul 21. 2024

노동과 예술을 넘나들며

#14. 나만의 색을 만들다

드디어 도배를 하는 날이다. 내가 우리 집 인테리어에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었다.

여동생에게 애들의 오전을 맡기고 혼자 관리 감독과 간식 제공을 목적으로 신집으로 출근했다. 아토피를 앓았던 아이를 생각해 도배지는 친환경 최고급으로 주문했다. 남 2 여 2로 꾸려진 도배군단이 도착했고 그들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에 반했다. 그리고 길쭉한 도배의자 우바를 보고는 탐욕이 생겼다.

 '아... 진짜 어제 의자만 있었으면 페인트칠이 금방 끝났을 텐데...


도배군단들이 내부를 쭉 돌아보았다. 걸레받이와 몰딩을 보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비전문가의 냄새를 느낀 듯했다. 그들이 어떤 ‘개 같은 업자’를 욕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재미있어 보여서 직접 했어요. 셀프인테리어가 유행이기도 하고.”

 “와~ 이걸 직접 하셨다고요? 쉽지 않은 건데...”

 “뭐 하다 보니...”


실수와 땜빵의 흔적이 여실히 보이는 걸레받이의 모서리 부분을 쳐다보는 눈길에 부끄러움이 살짝 일었다. 회피했다. 민망한 결과물이었지만 어제의 삽질을 통해 내가 배운 점은 많았다. 도배를 준비하는 그들은 지금 있는 도배지에 덧방을 하려고 했다. 그때 나는 당당하게 다 뜯고 하자고 얘기했다. 어제의 장판 철거 작업을 해보지 않았다면 절대 요구하지 못했을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루 만에 당당해져 있었다. 내 강력한 의지에 그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묵은 도배지를 뜯어 제쳤다.
실체와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생각보다 민낯은 맑은 집이었다. 평평한 회색 얼굴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일부 석고보드가 깨진 부분, 면이 고르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퍼티 작업을 해야 했다. 거친 부분을 부드럽게 만들고 없는 부분을 채우는 작업을 하였다. 내면이 꽉 채워지는 느낌이었다. 면이 매끈해지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본질에 한발 다가서는 느낌이 들었다.


도배가 진행되는 동안 여동생이 왔다. 풀 발린 종이를 뱉어주는 첨단(?) 기계 앞에서 딱히 우리가 도울 일은 없었다. 예전에 엄마가 도배할 때처럼 종이 네 귀퉁이를 붙잡아 줄 필요도, 빗자루를 건네줄 필요도 없었다. 걸리적거리기만 했다. 우리는 전동톱을 반납하기 위해 목재소와 자재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운전하며 가는 도중에도 줄곧 인테리어 얘기뿐이었고 이제껏 관심을 가지지 않은 페인트 가게, 목재소, 철물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중에 천막으로 가려진 싱크대 공장이라는 곳에 호기심이 생겼다. 싱크대가 오래되긴 했지만 주방에 대한 로망이 없던 나는 그냥 기존의 것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발길이 또 우리를 거기로 이끌었다.


호기심에 들어가게 된 싱크대 공장에는 다소 까칠해 보이는 사장님이 계셨다. 나는 동생을 툭 밀었다. 뭔가 서류를 만져야 하는 일이 생기면 동생은 나에게,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나는 동생에게 떠넘겼다. 우리 사이 무언의 룰이다.

“사장님~ 여기 싱크대 만드는 곳인가 봐요?”

“뭐 하게요?”

“지나가다가 봤는데 싱크대 판매도 하시나 해서요.”

“팔기야 팔지!”


싱크대라고는 개뿔도 모르는 아줌마 2명에게 설명하기도 팔기도 귀찮은 모양이었다. 나는 동생의 활약으로 싱크대 구조론 특강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여기 공장에서 만든 싱크대가 유명 브랜드 가구회사로 납품되는 것이라는 말도 전해 들었다. 중간 마진 없는 도매가격으로 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가 있나? 계획에 없던 싱크대의 상판, 개수대, 수전 등을 예약해 놓고 신나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주차된 차를 빼려는데 맞은편 가게들에 또 눈이 돌아갔다. 시트지 판매 및 필름 시공하는 곳이었다. 싱크대의 낡은 문짝 몇 개가 눈에 밟혔는데 신속히 해결해 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치는 수준까지 온 것 같았다. 시트지 쇼핑까지 마치고 나서야 현장으로 돌아왔다.


도배를 끝내놓은 집은 기대 그 이상이었다. 입이 떡 벌어졌다. 새 옷을 입은 집은 어찌나 화사하던지 너무 좋았다. 고생해서 칠한 화이트 몰딩과 잘 어울리는 화이트 벽지, 아이 방의 은은한 민트색 벽지는 나를 구름 위로 올려놓았다. 그뿐인가? 얇은 합지도 아닌 피부에 안 좋다는 실크 벽지도 아닌 숨을 쉰다는 친환경 에코 벽지 아닌가?

 

이제 진짜 우리 자매의 실력을 보여줄 시간이 되었다. 기대되는 미술 시간! 페인트칠이 시작되었다. 붙박이장, 신발장, 현관문, 앞 베란다, 뒷 베란다 벽면과 천장, 집안의 방문과 창틀, 베란다 타일까지 전부 싹 칠해야 했다. 일단 신나는 음악, 빠른 템포의 음악을 틀었다. 도배팀에게 빌린 우바 위에서 쓱쓱 롤러를 내리고 올리는 작업이 너무 재미있었다. 도배지에 묻지 않도록 섬세한 붓을 세워서 틈새 작업을 할 때는 정말 화가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도배가 되어있는 집에서 페인트 칠을 하는 것은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흰 벽면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흰색 페인트칠을 하고 있으니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사방팔방 화이트에 갇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나는 동생에게 너의 영걸 시스터에게 전화하라고 시켰다.


 “뭐 해? 바빠?”

 “회사지.”


 “주소 불러줄 테니까 적어.

 “왜?”


 “그 주소로 근처 중국집 검색해서 자장면 하나 짬뽕 하나 시켜줘.”

 “뭐 하는데?”


 “페인트 작업하느라 바빠.”

 “배*에서 시키면 되잖아.”


 “아니, 지금 1분 1초도 없어.”

 “뭐야”


툭 하고 끊었지만, 곧 자장면이 올 것을 안다. 그렇게 장갑을 벗을 필요 없이 다시 페인트칠했다. 가끔 나는 우리가 아버지의 명령조 말투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이에는 위에서 아래로, 언니는 동생에게, 동생은 또 그 밑의 동생에게 시키는 위계가 존재했다. 물이 아래로 흐르는 모습과 흡사했다.

도착한 자장면과 짬뽕 맛은 아주 맛있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동생이 근처에서 맛집에서 시켰다는 증거였다. 대충 하는 법이 없는 동생이어서 우리는 시멘트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식사를 했지만 만족스러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식사를 든든히 하고 나니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챙겨 온 아이들 미술용 도구통에서 나는 아크릴 물감 2개를 찾아냈다. 다홍색과 노란색 물감이었다. 한두 방울씩 화이트 페인트에 떨어뜨리니 어메이징~~~~ 중국집에서 준 나무젓가락으로 휘이 휘저었다. 흰색과 섞이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그 마블링을 보고 있자니 정말 예술가라도 된 것 같았다.


‘와~ 너무 예쁘다. 한 방울 더 타볼까?’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 명도와 채도를 맞춘 컬러를 만들어냈다.


 ‘이 지구상에 이 컬러와 같은 팬톤 넘버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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