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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고 덧바르면 그게 인생

#16. 아저씨, 정말 죄송했습니다.

by 백수광부

오늘이 지나고 나면 이제 나의 욕심은 내려앉을 것이다.

장판을 하는 날이다. 바닥까지 마무리 한 집에서 나는 얌전해지겠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인지도 있는 장판업체와 미리 약속을 해놨기에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집 계약하고 난 후부터 장판 고르는 데 어찌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층간소음을 잡아주는 쿠션감에, 질리지 않고 넓어 보이며 가구와도 잘 어울리는 그런 제품을 고르느라 꽤 고심했다.


기대만큼 믿음직스럽고 친절하신 장판 시공자가 오셨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모님, 바닥상태가... 여기 원래 장판 깔려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네. 장판 깔려있었는데 업체 불러서 철거했어요.”

미리 선작업을 끝내 두니 편하실 거라고 자랑하고 싶었다.


“제가 철거해도 되는데 두시지”

“그게 3중으로 들러붙어 있어서 장판 작업하기 전에 급하게 철거했어요.”

“근데 바닥에 본드 자국은 왜 그대로 있어요?”

“예?”


“그라인딩 안 해줬어요?”

“그라인딩이요?”

“이거 얼마 주고 했어요?”

“뜯어주고 폐기물 가져가 주는 조건으로 60만 원이요.”

“근데 그라인딩도 안 해주고 갔어요? 이거 사기꾼이네.”


비싼 가격을 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만큼 급한 일이라 여겼다. 왜 장판업체에 미리 조언을 구할 생각을 못 했을까?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 잘 모른다고 덤터기를 씌운 이들 때문에 이 업계에 대한 신뢰도 떨어지려 했다. 무엇보다도 뭔가 추가 요금이 발생할 것 같은 이 분위기가 떨떠름했다.


“그러면 이제 어쩌죠?”

“기계로 바닥 그라인딩 해야죠. 철거업체에 전화해서 좀 물어달라고 해봐요.”

내가 봐도 여기저기 오래된 본드 자국 위에 새 장판을 올리기엔 장판에게 미안할 것 같았다. 화장의 기본은 클렌징이거늘.

“그라인딩 하면 추가 요금 있나요?”

“20만 원인데 15만 원만 줘요”

“아... 네...”

뭐 가격을 비교하고 깎고 할 시간도 기력도 없었다. 그렇게 아저씨는 장판 작업하기 전에 바닥에 눌어붙어 있는 오래된 본드 자국을 정성껏 제거해 주셨다. '윙'하면서 갈려나간 가루들이 숨 쉬는 벽지의 숨통을 막아버리는 것만 같았다. 도배지 속에 박혀있을 미세한 먼지들이 두고두고 살면서 날 괴롭히겠지?


‘도배 전에 해야 했던 작업인데, 순서가 다 엉망진창이네.’


순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라 셀프 위로를 해봐도 자꾸 변수가 생기는 이 상황이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철거업체에 한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에 전화했다. 그쪽에선 다시 걸려 온 내 전화에 목소리를 깔고 받았다. 사후 불만족 전화라는 걸 직감했을 것이다. 거리를 두는 낌새다. 몇 마디 던져보다가 내가 상대할 상대가 아님을 깨닫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인테리어 카페에 확 올려 버릴까 보다’

이를 갈아봤자, 인테리어 총괄팀장인 나의 무지로 생긴 일이란 생각에 기분만 꿀꿀할 뿐이었다.


장판 아저씨가 작업을 하는 동안 난 동네를 구경하며 장판 이후 스텝을 구상하고 있었다. 휴대폰을 붙잡고 동생에게 철거업체를 씹어대면서 해장국을 주문하고 결제도 했다. 주인이 주는 검정 봉지를 들고 현장인 집으로 돌아왔다.


“매번 자장면 많이 드시죠? 이거 해장국이니 이따 출출하실 때 드세요.”


숫기도 넉살도 없는 내가 웬일인지 세심하고 따뜻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런 말을 해본 적이 없어 살짝 부끄러움도 일었지만 속으로는 뿌듯해했다.


아저씨 홀로 장판 작업을 하는 동안 대형 공구상가와 다이소를 오가며 실리콘, 실리콘 총, 실리콘 주걱, 샤시 고리, 문고리, 경첩, 장롱 및 서랍장 손잡이, 사포, 스티커 제거제, 줄눈제, 백시멘트, 락카, 스펀지, 연마기, 플러그 캡 등 집수리에 필요한 자잘한 것들을 사고 또 샀다.

‘공부를 너무 많이 했나 봐. 그냥 지나쳐지지 않네. 가제트 형사와 맥가이버도 울고 가겠네.’


때마침 장판시공업체에서 전화가 왔다. 장판 시공이 끝났다고 잔금을 부쳐달라는 전화였다. 점잖은 목소리의 팀장님에게 바닥 그라인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추가 요금이 조금 비싸니 5만 원만 깎아달라고 말씀드렸다. 나에게 물건값을 깎는 일은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걸 내가 해냈다. 야호!! 팀장님은 시공자에게 얘기하겠다고 했고 장판의 마무리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나는 집으로 올라갔다. 장판은 아주 흡족할 정도로 깔끔하게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삐침과 씁쓸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사모님, 그거 비싼 거 아니에요.”

“예?”

그렇게 아저씨는 철수하였다.


최선을 다해 시공을 해주었는데 5만 원을 깎아서 속상하셨던 모양새라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다시 볼 사이가 아니니 잊어버리자고 마음먹는 순간 나는 무너져 내렸다. 울음이 나올 뻔했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아까 사다 드린 해장국이 검은 봉지째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거기는 당연히 있을 거로 생각한 플라스틱 그릇도 공깃밥 흔적도 없었다. 그냥 해장국만 봉지에 담아서 준 것이었다.



나는 세심한 사람도 따뜻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내 문제에 꽂혀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런 하찮은 인간이었다. 두 손이 오그라들었다. 아저씨 휴대폰에서 내 이름을 당장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했다. 용기를 내야만 했다. 나는 아저씨의 저녁 식사가 씁쓸하게 마무리되지 않도록 바로 문자를 드렸다. 해장국에 대한 설명과 함께 추가로 부끄러운 10만 원을 입금해 드렸다. 다행히 아저씨는 웃는 이모티콘(^^)으로 답변을 해주었기에 나도 불편함 정도는 씻을 수 있었다.


장판 작업 후에도 나의 인테리어 작업은 끝날 줄 모르고 한 달 이상 지속되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연 핑크빛 베란다로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날이면 캠핑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본다. 그러고는 인테리어를 했던 그 급박하고 열정 넘쳤던 시간을 회상한다. 고치고 덧바르고 하면 완성되는 작업이 참으로 인생과 흡사하다.


p.s.>> 나와 함께 했던 마이 시스터는 2년 전 본인의 집 인테리어를 할 때 업자가 아닌 나와 상의하였다. 나는 현장에 도착해서 시댁 식구들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된다’라며 둘이 함께해 보이고 말았다. 그런 모습이 누적되면서 사돈 어르신은 며느리에게 말씀하셨단다.


“너는 도대체 못 하는 게 뭐냐?”

웃음이 난다. 페인트는 기본에 타일, 시트지, 줄눈까지 뭐든 한다면 하고야 마는 내 수제자!


아~~ 뭔가 신나는 느낌이다.



지금은 이렇게 완성된 집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온 열정을 쏟아 인테리어를 한 집은 그 후 손 하나 대지 않고 살았습니다. 글을 쓰다보니 다시 페인트칠이 하고 싶어지려 합니다.

글을 쓰면서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되짚어본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브런치 새내기 작가로 많은 분들이 사랑해 주신 브런치북 연재를 마칩니다. 저의 또 다른 브런치 북 '곁에 있는 것들을 위한 노래'도 많이 사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후 좋은 작품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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