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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색에서 칠까지

#15. 닥치면 다 합니다.

by 백수광부

내 삘에 충만해 흰색 페인트에 아크릴 물감을 한 방울, 두 방울 넣어가면서 만들어 낸 세상에 단 하나뿐인 페인트 색!

장롱 문짝 하나를 칠하려면 얼마나 페인트가 필요한지 감도 없는 상태에서 조색을 하고 페인트 칠을 한 초보의 실력치고는 아주 대만족이었다. 누구에게 시키는 일이면 이렇게 못한다. 욕먹는다. 하지만 내 집이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었다.


내가 창조해 낸 색으로 따뜻하면서 화사한 느낌의 컬러로 15년 역사의 MDF 붙박이장을 멋들어지게 재탄생시켰다. 총 8짝의 문짝은 순백의 화이트 2짝, 연한 베이지 2짝, 연한 민트 2짝, 다시 순백의 화이트 2짝으로 리듬감과 변화를 주면서도 통일성 있는 명도와 채도를 유지했다. 페인트가 미끄러지는 질감조차 표현하고자 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작품을 사진으로 담았다. 친구와 가족들에게 자랑했다. 인정욕이 많은 나였나 보다. 모두들 '이익!!' 하면서 놀라고 부러워하니 또 자신감이 하늘 끝까지 승천하였다.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피로가 누적되어 쓰러져도 또 뭔가 제 시간 내에 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던 에드워드 브랜드의 고급 화이트 페인트와 남은 민트색 페인트로 오래되어서 다리가 휘청거리는 이케아 서랍장을 아름답게 재탄생시켰다. 가성비만을 따지자면 새로 서랍장을 사는 게 나았지 싶을 정도로 돈과 에너지를 투자했다. 평생 못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트에 살짝 질린 나는 다른 색을 만들고 싶어졌다. 붉은색 물감을 조금 흰색 페인트에 타서 만든 연핑크색의 페인트로 앞 베란다와 신발장을 칠했다. 따사로움을 표현했다. 햇살이 따뜻하게 베란다로 들어오면 캠핑의자에 누워 핑크빛 세상으로 빠져들 욕심이었다. 집안의 죽어가는 화분들을 살려낼 연한 핑크색 베란다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자뻑의 단계까지 왔다.


아이 방에서 누우면 보이는 베란다 천장은 하늘색, 베란다 벽면은 신비함을 품은 쨍한 코발트블루로 칠해버렸다. 얼룩덜룩한 본바탕에 과감하게 색조화장을 시켜버렸다. 피카소가 살아있다면 동업하자고 명함을 주고 갔을 수도 있을 만큼 말이다.



신나게 칠을 하다 보니 어느새 밖은 컴컴해졌다. 도배를 하는 과정에서 떼어버린 전등으로 인해 실내에 전기 공급이 되는 곳은 안방과 욕실뿐이었다. 새어 나오는 빛줄기에 의지해서 야간작업을 마무리했다. 흰색인지 검은색인지 감각에 의존해서 칠할 뿐! 스마트폰 손전등에 의존하여 망나니 칼춤 추듯 페인트칠을 마무리 짓고 구집으로 퇴근했다. 아이들은 우리처럼 꼬질꼬질 해져 있었다. 하지만 멀쩡하게 생존해 있었다. 여동생과 나, 우리 둘도 흰색으로 얼룩진 검은색 작업복으로 아주 꼬질꼬질 해져 있었다. 모두 벗어던졌다. 샤워를 했다. 피부가 아주 거칠거칠했다. 머리에 묻은 흰색 페인트는 지워지질 않았다. 페인트공들이 수건을 왜 덮어쓰고 일하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뿌리염색 해둔 머리칼의 검은 염색약은 잘도 물이 빠졌는데, 흰색 페인트는 한 올 한 올 벗겨도 벗겨내기 힘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후들후들하는 팔로 전우애보다 진한 형제애를 느끼며 맥주잔을 기울였고 이내 푹 쓰러져 잠에 들었다.

'내일 눈 뜨면 또 내일의 막일이 기다린다. 오늘은 푹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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