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란서 고아의 지도

박정대

by 야옹이

그래피티


스웨터는 점진적으로 고쳐지고 있소


스웨터를 수선해 입고 나는 문득 불란서 고아요


낡은 밤에 녹색 의자에 앉아 어둠 속으로 쏟아지는 눈발을 보고 있소


눈이 내리는 밤이면 어둠은 한 마리 젖은 짐승처럼 꿈틀거리오


저물녘 맹수들의 싸움처럼 어둠은 또 다른 어둠을 만나 몽마르트르언덕 위를 뒹굴고 있소


화목난로 불꽃이 파놓은 다락방 동굴의 밤이오


멀리 있는 중국집은 중국풍으로 눈을 맞고 가까이 있는 빵 가게는 인디풍으로 눈을 맞고 있소


스웨터를 수선해 입고 나는 지금 불란서 고아요


낡고 오래된 밤에 앉아 눈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소


눈은 허공에서 멈칫거리다 또 다른 공허로 이동하오


이동하는 눈을 바라보는 눈은 검고 아름답소


검고 아름다운 그대의 눈동자를 생각하오


낡고 오래된 검은 밤에 앉아 나는 불란서 고아처럼 그대를 생각하오


검은 밤 검은 말을 타고 떠난 그대를 생각하오


육체는 육체에 부딪혀 맑은 종소리를 내고 영혼은 또 다른 영혼에 부딪혀 하얀 눈송이로 돋아나는 밤


차가운 밤의 계단에 앉아 나는 혁명적 인간을 생각하는 것이오


눈이 내리오 눈는 밤새 눈의 언어로 속삭이고 심장은 밤새 눈의 속삭임을 듣고 있소


전직 천사가 피위 올린 담배 연기는 지상의 깃발처럼 펄럭이고 밤새 다락방으로 내려 쌓인 눈송이들은 천창 위에 앉아 겨울의 시를 쓰고 있소


모두가 뒷골목과 바람의 고아요


마치 우리가 우리의 고아이듯


끝내 나는 나의 고아요


스웨터를 수선해 입고 낡은 밤을 수선해 들으며 나는 문득 불란서 고아요


낡고 오래된 검은 화폭에 그려지는 그래피티의 밤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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