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에서 네 손 놓지 않을게

어쩌면 못된 불운이 우리를 구원하게 될지도 몰라

by 강하라




인생은 마치 왼 손으로 끔찍한 타로 카드를 뽑으면서 오른 손으로 “이건 내 미래가 아니야” 부정하는 혼잣말 같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건 폭력, 사고, 장애 같은 예측 불가능성 속에서 피하려 팔 다리를 꺾다가 나도 몰래 춤추는 일과 닮아있지. 내일 아침에 전투기가 48층 아파트 창문을 뚫고 추락할 수도 있잖아. 그 순간 나보다 사랑하는 네가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잖아. 이런 말을 꺼내면 사람들은 말한다. 너는 너무 걱정이 많아. 그냥 하루하루를 즐겨. 즐기자는 건 아마도 주문이다. 또한 그런 불운이 우리를 향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렬한 세뇌, 혹은 간절한 기도인지도. 매번 왜 인간은 기도하지 않을 때 더 기도하는 형상을 하지?


불운이란 것은 빨래를 하고 있을 때나 횡단보도를 건널 때, 왼쪽에 빙빙 돌면서 언제든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검은 날개의 반려자다. 그렇다고 그가 딱히 악의를 지닌 것 같지는 않다. 날개가 다 검다고 악마라는 것은 편견이고 악마가 다 나쁘다는 것도 편견이니까. 보통 편견이란 축적된 경험치로 발현되는 생존 본능이고 그것이 대게는 옳지만 그 반대의 가능성을 무시해선 안된다. 다만 여기서 그 검은 날개의 아이큐는 돌고래와 비슷하고, 정신 연령은 미취학 아동보다 낮다면. 그가 가끔가다 심심할 때, 한순간, 생각 없이, 툭, 버튼을 누른다면. 그리고 으아아악! 플레이어가 우는 시스템이라면 어떨까. 보번햄의 ‘못 나가서 만든 쇼’에서 등장하는 크라잉 게임처럼 말이다. 이러한 랜덤 한 순간이 무수히 반복되는 것이 인생이라면. 그러니까 당신에게 일어난 수많은 절망들은 신의 뜻이라거나 선물의 포장상자가 아니라면. 벌써 좌절스럽지 않나? 그 불확실함은 당장이라도 “게임 종료 버튼”을 누르고 싶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용기를 지닌 사람은 이미 현실 바깥에 있겠지. 그렇기에 우리가 여기 한데 모여 살고 있는 것이니까.


인간은 불운에 대항하기 위해 불안이라는 감정을 발명했다. 그를 달래기 위해 더 높은 담을 쌓고, CCTV를 달고, 재산을 불려 가며, 아이에게 그 재산을 효율적으로 물려주는 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불운을 유독 자주 맞닥뜨린 사람을 향해 침을 뱉었다. 헤이터를 미리 헤잇하는 헤이터. 나는 아직 저렇게 되지 않았으니까. 이 세계는 아직 나에게 관대하니까. 저 사람과 나는 태생부터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선택받은 자와 선택하지 못한 자의 세계는 달라. 음음. 그렇고 말고. 이렇게 세상은 점점 완벽하고 아름답고 통제 가능한 척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그 몸부림이 정말 우리를 불운으로부터 구원했을까? 구원조차도 헤드폰 속 노래 가사로 학습하는 시대에서. “그곳이 지옥이라도, 곁에 있을게.” 이 문장은 과연 사탕발림이었나 맹약이었나. 케이팝의 장르는 판타지였기 때문에 모두가 열광했던 걸지도 모른다. 구원이란 현실에서 일어날 일 없는 것이니까.


오늘 개봉한 윤가은 감독의 영화 ‘세계의 주인’을 보았다. 그곳엔 인생을 망치는 ’끔찍한‘ 일을 겪고도 누군가와 누군가의 집을 함께 청소하고, 밥을 먹으며, 웃고, 소리치고, 장난치고, 재판장에서 손수건을 건네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계의 끝에서 서로를 구원’하는 장면은 CG 가득한 배경에서 화려한 메이크업을 한 사람들이 일제히 춤추는 장면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문 밖을 나서면 보이는 풍경이었다. 폭풍이 한바탕 몰아친 다음 날에도 세계는 끝나지 않았다. 잔뜩 에러와 버그가 떠도, 데이터가 리셋되는 일은 없고, 눈을 뜨면 과거 저장 시점으로부터 일상이 재생된다.


‘끔찍한’ 일이란 뭘까, ‘피해자다움’이란 뭘까. 어떠한 사건은 그라는 인간을 이해시켜 주는 도구가 되기도 할까. 용기, 응어리, 고백. 그런 키워드는 누군가를 얼마나 어떻게 대변할 수 있을까. 때마다 인간은 피해자를 가해자보다 날카롭게 몰아세운다. 우리와 다른 종족이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를 색출해내서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나는 그런 못되고 비열한 인간들과 다른 존재이고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외계인이 되기로 결심했던 때도 있다. 그치만 인간이란 못되고 왠지 연약하고 안타까운 존재들인 걸. 한편 인간들은 피해자들의 아무렇지 않은 삶을 보고 싶어하기도 한다. 그 어떤 불행에도 삶을 지속해도 된다는 희망을, 그러한 종류의 증표를 몸 한 구석을 뒤져서라도 찾아내고 싶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다가 피하고, 위로를 건네고 싶어 하다가도 이 위로가 선을 넘은 것은 아닌지 걱정한다.


어떤 나약한 사람들은 그 불행이 옮을까 무서워서 그가 마치 불행인 마냥 욕하고 세계로부터 없애기 위해 평생을 바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인간들은 중요하지 않지. 다만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더 어려울 뿐이다. 더 좋음, 더 나음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둔 사람들이니까. 그럼 그 사람들 앞에서 피해자가 된 나는 더 아무렇지 않아 할 것이다. ‘끔찍한’ 일을 털어 놓고, 털어버리려 애쓴 지난 과거들을 털어놓고 나서, 나는 그저 나라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나를 어색해하지 마. 부담스러워하지 마. 조심스레 유리상자처럼 대하지 마. 특별 대우하지 마. 나는 그냥 나야. 그런 중얼거림 역시 부자연스럽게 느껴질 까봐 자연스러움을 연기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너는 내가 기괴한 괴물로 보이겠지. 그래도 껴안아줄 수 있겠어? 나의 고백이 돌이킬 수 없어질 까봐 욱하는 성격을 고쳐야겠다고 머쓱해하면서도 속이 시원한 것은 지금 내 곁에 있는 너 때문이다.


나, 사랑하는 우리 엄마, 사랑하는 내 동생, 사랑하는 내 친구와 언니, 사랑하는 강아지, 걱정되니까, 사랑하니까.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사랑하는 이의 슬픔을 함부로 짐작하지 못해서, 감히 그가 되어보려 애쓰고, ‘나’의 범주 안에 ‘너’를 포함시키려는 시도를 자꾸만 한다. 이 예측 불가능함 속에서 사랑이 작대기를 그으며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높은 담을 치지 않고도 발 뻗고 잘 수 있지 않을까. 저 사람의 작대기가 갑작스럽게 나에게 향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 예측불가능함을 내심 기대하면서.


실은 인간의 불안이 약점이 아니라 타인을 상상하게 만드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이기적임은 이타적임의 다른 말일지도 모르고.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에 불안해하는가가 결국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가의 척도가 될지도 모른다. 헐거워진 나사가 보이면, 그것이 나를 덮칠 까봐 불안해하는 사이에 그 나사를 조이면 된다. 무엇에 대해 모르는 건 아는 것보다 기쁜 일이 될지도 모른다. 내일 내가 길 위에 나앉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노숙인을 위한 쉼터로 이어지고, 언젠가 내가 장애인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보행로를 고치고 점자블록을 깔게 만든다.


혹여나 이 짧은 시간 동안 내가 그 불운들을 모조리 피해 간다 해도, 너마저 그러한다 해도. 자꾸만 불안해서 너를 들여다보고 너의 눈망울을 슬퍼하다가 보면

다시 태어나서 우리, 조금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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