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더 넓은 세계를 향해 기꺼이 팔 벌리기
나는 영화에 대한 결핍이 있다.
방탄소년단 RM이 쓴 글을 본 적 있을 것이다.
"해외 영화들 다들 혹성탈출이니 쇼생크니 대부니 고전부터 줄줄 읊고, 어느 영화의 그 장면이 어쩌구 하면 나만 안 본 것 같아서 영화력 딸리는 것 같아서 열심히 짬 날 때 한두 편 봐보려고 하는데 한두 편 보면 나는 너무 힘들고.. 다들 언제 그렇게들 스콜세지, 고레에다, 히치콕 그리고 독립영화들까지 줄줄 꿰시는지... 세상에 나만큼 영화 안 본 사람이 없는 것 같을 때... 외딴 섬 바보 된 것 같은 기분 아시는 분..."
누군가의 솔직한 고백은 묘한 용기를 준다. 소위 ‘있어 보이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세상에서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 끝내 따라잡지 못할 것들에 대한 담담한 인정이 오히려 멋있게 느껴졌다. 대체 영화가 뭐라고, 우리는 왜 호수 위 백조처럼 발버둥치는 걸까. 영화에 대한 정체 모를 집착과 불안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 답을 알지 못하면서도, 내 발걸음은 어김없이 영화관을 향했다.
취향이라는 것은 유전처럼 전해지는 걸까. 학창 시절의 관심사는 대부분 부모의 취향에서 비롯된다고들 한다. 우리 집은 영화에 그리 큰 관심이 없었다. 마블 영화가 개봉할 때,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블록버스터 영화가 TV에서 광고될 때, 그럴 때만 간혹 영화관에 갔다. 어쩌다 영화관에 가면 나는 그 풍경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어딘가 꿈같다고 느꼈다.
언제였을까. 신촌의 어느 영화관으로 향하던 길, 근처 서브웨이에 들렀다. 호기롭게 샌드위치와 쿠키, 콜라를 주문하면서도 내심 두근거렸다. 엄마 아빠는 이런 곳 많이 와봤겠지? 생각하며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린 내게 번화가는 어딘가 낯설었다. 한국이 아니라 처음 보는 외국의 작은 가게들이 익숙한 풍경 속에 섞여 있었다. 영화관 대기실 벽에는 그래피티가 잔뜩 그려져 있었다. 그날의 풍경이 선명하진 않지만, 마치 수채화로 덧칠한 듯 몽환적인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중학생 시절, 할아버지의 친구는 정동극장을 운영하고 계셨다. 그 덕에 티켓을 몇 장 얻어, 반 친구들과 함께 청계천을 지나 정동극장으로 향했다. 푹푹 찌는 한여름,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이는 분수대 안에서 친구들과 물장구치던 장면들, 반팔티를 탈탈 흔들어 말리면서 서로의 눈을 보고 웃음이 터지던 순간들, 어떤 고민도 없이 마냥 행복만 부유하던 시간. 세세한 건 기억나지 않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그날의 반짝이는 장면들이 불쑥 떠오르곤 했다. 우리가 무슨 영화를 봤더라? 그당시 나는 영화에 전혀 관심이 없던 것 같다. 목적지는 극장이었지만, 그냥 중학생들의 일탈 여행이나 다름 없었다.
10년전 나는 매번 하드커버의 앨리스 일기장을 사면서도 정작 일기는 거의 쓰지 않았다. 그 두툼한 페이지에는 온갖 소재들 위로 덧붙인 노랫말의 흔적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단 네 장, 유일하게 일기로 남겨진 기록이 있었다. 거기에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 대한 감상이 적혀 있었다.
“유치한 액션씬과 뻔한 결말의 기존 블록버스터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에서는 감독이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애쓴 흔적이 보였다. 무엇보다, 여성 캐릭터들이 ‘민폐’ 혹은 ‘악세사리’ 취급에서 벗어나 주체적이고 강인한 존재로 등장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연기뿐 아니라 연출, 전개, 인물 구성까지 오래도록 준비해 온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몇 곡의 노래를 만들었다.”
사춘기 시절, 마치 평론가라도 된 듯 어른스럽고 덤덤한 척 이런 감상을 남겼지만, 사실 이 영화는 내 인생의 또 다른 분기점이었다. 그전까지 영화를 그저 오락거리로만 소비하던 내가, 처음으로‘세상을 바꾸는 영화’의 존재를 감각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영화는 세상까진 아니더라도 한 세계 정도는 뒤흔드는 힘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마치 f(x)의 Pink Tape 앨범에서 ‘Toy’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그전까지 내가 알고 있던 걸그룹 노래란, 남자 팬의 사랑을 받기 위해 더 예쁘고, 더 섹시하고, 더 유혹적으로 자신을 전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f(x)의 음악은 그런 틀 바깥에서 더 넓고 주체적이며, 여성간의 연대를 추구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노래를 듣고 음악 프로듀서가 되기로 결심했듯, 매드맥스를 보고 심장이 뛰었다. 무언가 내 안에서 시작될 것만 같은 꿈틀거림. 나의 세계는 돔처럼 투명한 막으로 덮여 있었고, 그 영화는 그 막에 구멍을 내어준 것이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영화 취향은 정반대였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보면 “이거 순 만화잖아, 만화.”라며 질색했다. 그들에게 ‘좋은 영화’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를테면 ‘납치된 딸을 아버지가 구하는 이야기’의 2930번째 변주 같은 작품이었다. 반면 부모님은 정반대였다. "돈값 하는 영화를 봐야지." 하며
3초에 한 번씩 CG가 번쩍거리고, 음향이 몸을 울릴 정도로 빵빵해야 비로소 영화라고 여겼다. 나는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어렸던 난 어떤 인터뷰에서 민희진이 블레이드 러너와 펀치드렁크 러브를 인생 영화로 꼽았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는 그 영화들을 보지도 않았으면서 내 인생 영화가 될 것이라 단언했다. 얼마나 대단한 서사와 미감을 가졌길래... 나는 그 영화들을 하루빨리 보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환상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오즈의 마법사 속 에메랄드시티처럼 한 번 그곳에 발을 들이면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고, 지금과는 다른 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왜인지 선뜻 발들일 수 없었다.
당시 우리 집에서 영화는 가끔 보는 것이었고, 독립영화는 거의 사치에 가까웠다. 혼자 영화관에 가는 것, 특히 ‘돈값을 하지 않는다’고 평가받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늘 누군가의 추천을 받거나, 미리 로튼토마토 지수로 확인된 작품만 봤다. 무엇보다 ‘먹는 게 다다’라는 가치관이 깊게 새겨진 집안에서 자란 나 역시 영화 한 편에 쥐꼬리만 한 용돈을 쓰는 것이 낭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들수록, 나는 오히려 내 안에 자리 잡은 ‘문화적 가난’을 박박 씻어내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히려 객기를 부려봤다. 밥값을 아껴 영화를 봤고, 하루에 다섯 편, 여섯 편씩 몰아보며 극장 안에서만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 용산아이파크몰 CGV에서 심야영화를 보다 막차가 끊겨, 극장 로비에서 홀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다. 나는 멀쩡한 집 놔두고 왜 여기서 이렇게 생고생 중일까. 속으로 엉엉 눈물을 흘리며 퇴근하는 직원들의 눈치를 봤다. 새벽 3시, 참고 견딘 시간이 아까워서 택시를 잡아타지도 못하고, 딱 세시간만 더 버티자고 다짐했다. 참다 참다 시계를 보면 5분정도만 지나있었다. 노숙에도 배짱이 필요한 법인거지. 딱 미쳐 돌아버리겠는데 이 선택을 그다지 후회하진 않았다. 이것도 다 경험이겠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