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수퍼공감자는 왜 차가운가
불구덩이에 스스로를 태우고 나면, 나 같은 수퍼공감자는 사뭇 냉담해진 것처럼 보인다. 더 이상 쉽게 웃지 않고, 상대의 기분에 맞춰 움직이지 않으므로- 그 냉감은 가까운 사람이 제일 먼저 가장 깊게 알아차리고, '변했어.. 예전 같지 않아'라는 반응 일색이다.
"엄마, 요즘 밖에 나가면 좀 무섭게 느껴지더라. 예전엔 안 그랬는데. 엄마 별명이 뽀로로였잖아. 유치원 선생님 같았는데.."
첫째 때는 그랬다. 놀이터에 나가면 나를 헌신해 상대방에게 맞추는 일이 내 사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아이들의 꾸밈없는 웃음을 볼 때 행복했다. 그러나 동시에, 놀이터는 아주 친절하게 생긴 정글이므로- 종종 부모라는 이름의 어른들에게 이용당하는 일도 잦았다. 내가 열심히 놀아주면 뒤에 물러나 무료 보모를 뒀다는 듯한 자세로 휴식을 취한다던지 하는 식이었다.(안 그런 경우가 드물었다는 건 슬픈 사실이다) 아무튼 전체 상황을 몰라서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그것이 내 아이에게 줄 긍정적 영향이 크다고 계산했기 때문에 꽤 오랫동안 나는 뽀로로 얼굴을 유지했다.
매우 피곤함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둘째 때는 둘째가 언어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고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회화 과정을 익혔을 즈음에(초등 3학년 이후), 더 이상 놀이터에 쫓아다니지 않았다. 뽀로로 가면은 처음부터 벗어던졌다. 나를 잃지 않는 것이, 관계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내면의 선함까지 집어던진 것은 아니었다. 나의 에너지를 아무 때나 아무한테나 쓰지 않기로 한 것에 가까웠다. 타인을 위해 시도때도 없이 진심을 쏟아붓는 일을 멈추니, 가만히 있을 때 나를 향해 미소 짓는 때가 늘었다. on off를 할 수 있는 상태, on 상태더라도 공감과 이해의 세기를 조절할 수 있는 상태. 새로운 상태의 내 모습에 적응하고 조율하느라 몇 년이 걸린 것 같다.
최근 기술과학의 화두는 '에너지'다. 데이터센터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에너지도 제대로 모으고 정확히 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