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10. 건강하게 분노하라

과거와 현재의 그림자를 대하는 자세

by 아보카도

친부와 친모는 수십 년 전 이야기를 곱씹고 또 곱씹으며 자식에게 같은 이야기를 반복했다. 얼마나 고생해서 허리띠를 졸라맸는지, 악착같이 돈을 굴려서 투자(내가 볼 때는 투기다) 높은 이자를 감당하느라 애를 먹었는지, (자식한테 쓰는 계란값도 아까워해서, 종종 밥상에서 네가 반찬을 너무 가져가네 어쩌네 하며 언성을 높였다. 옷도 여기저기서 물려 입히고 어쩌다 새 옷 한 벌을 사 주고는 일주일 내 입혔다, 심지어 빨지도 않는 바람에 나는 학교에서 냄새나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얼마나 물려받은 것 없이 제 손으로 일구느라 뼈 빠지게 고생했는지 말하기와 무엇보다, 상대 배우자가 얼마나 비정상인지 험담을 늘어놓는 데 열을 올렸다. '네 엄마 때문에 이 고생이 시작된 거다' '네 아빠가 그때 어떻게 한 줄 아니' 한 번 시작하면 몇 시간째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앉혀놓고 언제 끝날 지 모르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허옇게 버즘 핀 얼굴로 가슴이 답답해서 습관처럼 한숨을 내몰아 쉰 게 고작 초3이었으니(땅만 보고 한숨 쉬며 걷는 걸 걱정하기는커녕 남들 앞에 병신처럼 보인다며 엄청 혼이 났다. 정신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하긴. 친모의 하소연을 속절없이 듣기 시작한 게 말귀를 알아들을 서너 살 때부터였다는 걸 감안하면 그럴 만도 했다. 지금이야 오은영 박사님이 금쪽이 부모한테 단호한 NO를 제시하는 시대지만 그때는 전혀.


나는 집안에서 그러고도 밖에 나가면 '너네 집 잘 살잖아' 소리를 들었다. 한강뷰 아파트를 자가 소유한, 제주도에 땅이 있고 부곡동 그린벨트에 투자한 지 오래되는, 30년 전에도 몇천만 원이니 몇억이니 얼마를 빌려주니 이런 얘기를 전화기 너머로 익숙하게 듣고는 했던 집 장녀였다. 학교에서는 테니스 선수반에 등록하고 주말 야간엔 친부와 그때 당시 백만 원에 가까웠던 스키장비를 갖추고 스키강습을 듣고 리프트를 탔다. 이제 막 크는 초등학생한테 등산화를 따로 사주며 친부는 자신의 취미생활에 자식을 끌고 다니기 바빴다. 내가 느끼는 세상은 '그냥 먹을거나 잘 주고 옷이나 똑바로 입히고 싸우지나 말지'였다.


누구를 위한 고급 취미생활이었으며 무엇을 위한 부동산 투자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들 앞에 '남다른' 모습을 보여대느라 바빠 정작 집안은 쓰레기장(실제로 나는 친모가 이불빨래하는 걸 본 적이 없고, 식탁은 언제나 어지러웠으며, 손톱깎이 하나를 찾으려고 해도 온 집안을 들쑤시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모든 물건에 제자리라는 건 원래 없는 줄 알았다)이었다. 너무 창피한 기억 중 하나는, 손님이 오셨을 때 물한 잔 내놓지 않는 그들의 인색한 태도와, 그걸 또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친구를 데려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스스로 대접할 과자 한 봉 지도 없는 (사놓지 않는) 집이었다. 그렇다고 나가서 사주라며 돈을 쥐어주는 것도 아니었다. (당연히 학교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언젠가 친부와 친모에게 따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엄마는(아빠는) 다른 사람을 도와 본 적이 있어?"


그때 적잖게 당황한 부모 얼굴을 기억한다. 그런 질문은 평생 처음 받아보는 것 같았다. 둘 다 횡설수설이었다. 도움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주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다는 거였다. 자식을 돕는다는 것도 같은 이치에서 있을 수 없었다.


지표상 내 부모는 여전히 가난하지 않다. 특히 친부는 서울 제기동 139-1. 망하지 않을 명문대 앞 원룸다가구주택 소유자다.(얼마전 용인 수지 다가구주택을 팔고 갈아탔다. 나는 그런 대학가 원룸(주인집 아님)에서 큰애를 만 2년을 키웠다) 나는 솔직히 그런 식으로 쌓아올린 그들의(시부모 포함) 부동산이 개박살 나기를 기도한다. 거친 물살에 휩쓸려 말년에 고생하기를. 부디 '뿌린 대로' 거두기를.

작가의 이전글과고 입성기 11. 경기의 경계선은 어디까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