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 15. 무언가와 싸우다

내가 그 무언가가 되지 않을까.

by 아보카도

남편과의 이야기는 언젠가부터 에너지 소진이 가파른 과정이 됐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말의 온도가 맞지 않았다. 아이가 힘들어 우는데 가볍게 치부해 적절치 않은 웃음을 흘리거나, 중요 1,2,3순위를 말하면 8,9,10순위의 중요하지 않은 일로 화제를 돌려 회피하거나, 순간적으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생각의 깊이라고는 없는 아무 거짓말이나 하고 보는 식이었다.


꽤 오랫동안 내 태도가 문제는 아니었을까, 내가 혹시 놓치고 있는 부분은 없을까, 내 반응을 검열했다. 수 년동안. 많게는 십 수년 동안.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밀려오는 허탈감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어서, 나는 그간의 신중히 경청하던 태도를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열심히 들어줬더니, 돌아오는 게 자기기만 가득 찬 망상이었다면,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가장 잘 먹힌 문제 해결 방식은 남편의 어머니처럼 대하는 거였다. 무시하거나, 듣지 않고 다다다다 눌러 버리거나, 논리적 결함을 발견했을 때 참지 않고 거의 개취급을 해버리는 것. 이게 얼마나 잘 먹혔던지, 한동안은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흡사 시어머니가 시아버지를 대하는 모습이었다. 남편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며, 존재 자체를 입만 열면 거짓말하는 상대로 규정하고, 어떤 얘기를 시작하든 ’지겨운 헛소리 또 시작인가‘ 하는 인상을 팍 날려주는 권법이었다.


내가 그렇게 이상하게 여겼던 시어머니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될 지경이었고, 남편 집안의 남자들 자체가 분리수거 안 되는 쓰레기 같아 보이기도 했다. 나는 막말을 집어던져 헛소리가 빠져나올 틈새를 막았다. 막고 막고 막다 질문이 훅 들어왔다.


‘무언가와 싸우다 내가 그 무언가가 되어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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