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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일영 Sep 11. 2015

정동길

지나치게 쉽게 지나치는

집 앞에 있었다면 지나쳤을 아름다움



휴가 시즌이 끝나간다. 늦여름을 정말 뜨겁게 달궜던 무더위도 조금씩 잦아들고 있고 간간이 내리던 비도 잦아들고 있다. 문득 이번 여름이 도대체 어떻게 지나갔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럴 때면 핸드폰 사진첩을 열어보곤 한다. 거기엔 늘 내가 미처 기억하지 못 한 것들이 남아있다. 뜨거운 정동길을 걸었던 기록도 남아있었다.


벽돌을 쌓듯이 기억도 쌓고 찾을 수 있다면



SNS는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특히 사진을 찍는 습관을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제는 당연히 SNS에 올릴 것을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기 때문에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사진을 찍는다. 대충 눈에 보이는 것들을 프레임 안에 모조리 집어넣고 마구 찍던 것이 이제는 조금이라도 더 감각적이고 스타일리쉬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고민하게 된다. 기억을 공유하기 위한 사진이 아닌 감각을 공유하기 위한 사진이 되었다. 훗날 친구들과 가족들과 꺼내보면서 낄낄대던 사진을 찍으려면 이렇게 찍으면 안 될 것 같다. 트렌드는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놓쳐선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기억을 나누는 건 감각을 나누는 것보다 소중하다, 올드해 보일 수는 있겠지만.


 

사진으로 보니 외국의 리조트 같은 성당 입구


장엄함과 인자함은 사실 멀지 않다


튼튼한 성당에 품긴 탓일까, 건강하다.



모든 성당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성당이 이렇게 생긴 것도 아니다. 이 성당은 아름답고 친절하고 편안하다. 하늘 높이 지어지지도 않았고 특별히 눈에 확 띄지도 않는다. 나는 이런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화려하고 멋진 아름다움보다 수수하고 인공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좋아한다. 모든 아름다움은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내가 감흥을 주는 것은 이런 아름다움이다. 자연스럽고 수수한 아름다움. 그래서 그런 사람이 좋고, 이 성당이 좋다. 


푸른 LED 보다는 누런 백열등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중명전이라는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 심지어 정동길을 수년을 걸어도 잘 모른다. 그래서 중명전을 찾으면 뭔가 비밀스런 기쁨이 느껴지곤 한다. 사진에는 없지만 넓은 잔디밭을 보며 바람이 솔솔 부는 테라스에 앉아 있노라면 목가적인 평화가 느껴진다. 오랜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는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도 기쁨의 하나이다. 저 전등이 얼마나 오래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조형적인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중명전은 그런 곳이다. 아무도 모르는 오래된 비밀의 화원 같은 곳.


벤치의 촉감을 아는 이는 아이 뿐이겠지



요즈음은 아직 휴가를 떠나지 못 한 이들에게도, 아직 휴가의 여운이 남아있는 이들에게도 똑같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날이다. 이럴 때 정동길을 찾아보자. 한낮에는 뜨겁고 저녁 무렵이면 선선한 정동길에는 늘 그 나름의 여유와 아름다움이 있다. 지금 마음의 여유와 휴식이 필요하다면 정동길을 걷자. 아주 천천히.


정동길, 지나치게 쉽게 지나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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