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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계발 처방전

by 마이분더








아침에 일어나 날씨가 좋으면 그럭저럭 괜찮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오늘은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분다. 안개마저 자욱했고 역시나 희뿌연 회색구름처럼어두운 기분이었다. 그나마 오전 9시까지 푹 자고 일어나면 나아지는데 평일 아침은 쓸데없이 아침형인 아이의 인기척에 새벽6시쯤 눈을 뜬다. 물론 잠든척 하고 거실로 나와보진 않지만 몸만 누워있을 뿐 나의 모든 신경은 거실로 나가있다. 그럴바에야 몸을 일으켜 운동을 하거나 책이라도 읽으면 좋으련만 핸드폰 화면속에서 연신 눈운동만 열심히다. 그 시간 아이는 거실 밖에서 나름데로 살금살금 걸어다니며 어떨때는 허밍으로 노래를 부르고 나의 당근열정에서 겨우 살아남은몇 안되는 기차장난감을 굴리며 시간을 떼운다. 어쩌다 기분내키면 어차피 오후에 해야 할 연산문제집 한 장을 미리 풀어놓기도 한다. 나는 사실 요즘 문제집 넘기는 소리가 제일 좋다.


새벽내음이 사라지고 진짜 아침같은 8시가되면 아이의 아침밥을 챙긴다. 주로 모닝빵에 딸기잼을 바르고 그 사이 치즈와 햄을 넣는다. 그리고 계란후라이에 다진야채를 넣어 케첩을 뿌리고 사과 반조각을 잘라준다. 우유도 필수다. 편식쟁이라 아침 메뉴는 거의 매일 똑같다. 어쩌다 내가 너무 귀찮을땐 흰밥에 김만 주는데 이걸 그렇게 맛있어 한다. 8시35분이 되면 아이는 드디어 집을 나선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는 이별이 너무 반갑다.


아이와 기분좋은 이별을 마치면 슬슬 졸음이 밀려온다. 사실 졸립지 않아도 애써 졸려보려고 애를 쓴다. 졸리면 잘 수 있는 기쁨이 나는 너무 좋다. 특히나 오늘처럼 기온은 차갑고 창밖이 어둠일 땐 뜨끈한 전기장판 속이 그렇게 위안이 된다. 아직 켜져 있는 전기장판속으로 들어갈 생각에 마음이 빨라졌다. 그런데 아이 우산챙기는 걸 깜빡했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보니 고장 난 분무기 같은 비를 뿌린다. '이쯤이야 뭐, 우산은 안 써도 그만이지' 다행이라 여기며 창문을 닫고 걱정도 닫았다.


드디어 이불속으로 직행!....하려니 이번엔 눈앞에 흐트러진 식탁, 널브러진 책상, 바닥엔 과자부스러기가 보인다. 서둘러 치우고 소파 위 쿠션까지 일렬종대 각을 잡았다. 먼지는 안 닦아도 눈앞이 깨끗해야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나도 어쩔 도리가 없다. 치우다 보니 10시가 다되었다. '이젠 진짜 누워야 할 시간인데'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배가 고팠다. 하나 남은 계란 한 알은 아이 줬고, 밥솥에 밥은 없었다. 다행히 싱크대 왼쪽 구석위에 딱 한 개 남은 모닝빵이 보였다. 네 잎클로버를 찾은 것 같았다. 냉장고 안에는 치즈 한 장, 먹다 남은 슬라이스 햄이 남아 있었다. 모닝빵 속으로 우겨넣고 내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뭐라도 먹었으니 양심상 트림이라도 하고 누워야지 싶어서 TV를 켰다. 반팔티셔츠를 색깔별로 5장 판매하는 홈쇼핑 채널이 보였다. '저 색깔 티셔츠는 없는데'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 핸드폰을 꺼내드는데 배송안내 문자가 날아왔다.아이 침대였다. 7살 때 학교 입학하면 사주겠다던 아이 침대를 2년이 지나서야 구입한 것이다. 그것도 2년동안 잊을만 하면 "엄마 내 침대는 언제 와?"라고 묻고또 묻는 아이에게 더 이상 둘러댈 말이 없어서 사줬다.아무튼 목돈이 나가서 돈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반팔티셔츠는 결국 사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역시 날 위하는 건 전기장판 뿐이다. 냉큼 이불속으로 들어가 살짝 잠이 들었다.


순식간에 1시간이 흘렀고 오전 11시가 넘었다. 사실 나는 오전 10시만 넘으면 다급해진다. 그때부터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고 아침에 적어놓은 투두리스트들이 나를 쫒는다. 아이가 오기 전에 후다닥 내 할 일을 끝내고 싶기때문이다. 오늘은 서평단으로 받은 책의 서평을 쓰고, 강의를 듣고, 10분 동안 영어를 외우고, 글쓰기를 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결혼 이후 나는 희한하게 자기 계발에 열을 올리게 되었다. 남편 때문에 열불이 날수록, 육아고민에 지쳐갈수록 열기는 더 강해졌다. 듣고 싶은 강의를 듣고 있으면 나도 저기 보이는 강사의 말처럼 될 것만 같아 희망이 생겼다. 마음이 힘들어질수록 가짓수는 늘어갔다. 무언가 새로운걸 알게 될 수록 인생도 새로워지는 것같았다. 강의를 듣는 시간이 심리상담을 받는 것처럼 평온해졌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고 오후 2시쯤 추어탕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모닝빵으로 아침을 대충 때웠으니 몸보신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때도 혼자 뉴스레터를 읽으며 밥을 먹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전기장판에 들어갈때만 유일하게 관대해지고(쯧쯧) 모든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끌적하면 무기력해지고 자주 어두워지는 일상에 자기 계발은 연약하게 흔들리지만 빛나는 촛불 같았다. 효과 빠른 감기약 같았다.


오늘도 나는 스스로 처방전을 내린다. '10분 영어, 부동산 재테크, 퍼스널브랜딩, 블로그 수익화, 인스타그램 ..... ' 그렇게 한 열 알쯤 한꺼번에 삼키면 잠시나마꿈을 이룬 듯이 기뻐진다. ‘강의'를 '공부'로 착각하며 예능 보듯 시청하지만 그래서 어느 하나 이룬 것은 없지만, 분명히 나는 자기 계발 늪에 빠져 있는 동안 행복했다. 매일 아침 빼곡히 채워지는 투두리스트들을 지워가며 마지막 남은 할 일을 체크할 때는 백수 주부의 삶에 퇴근의 해방감까지 만끽하게 해 준다. 나는 자기계발로 모든 순간마다 희망을 찾고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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