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설였다. 어제도 망설였고 오늘도 망설였다. 아마 내일도 망설일 거다. 생각해 보니 나는 살면서 하루도 망설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망설임의 유전자는 아이에게도 전해졌다. 아이는 동네를 지나다니다 친구를 만나면 갑자기 빠른걸음으로 앞질러 가거나 내 뒤로 숨는다. 친구가 먼저 아이를 발견하고 인사하면 그제야 아이도 인사를 한다‘먼저 인사해야지 왜 그러는 거야?' 했더니 '먼저 인사했는데 친구가 못 보고 그냥 지나가면 어떡해'라고 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학교 쉬는 시간에도 친구가 먼저 놀자고 다가오지 않으면 자리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부지기수다. 나는 또 물었다.’먼저 가서 놀자고 하면 되잖아'. 아이도 답했다‘놀자고 했는데 싫다고 하면 어떡해'. 아무튼 영락없이 내 유전자다. 우리 모자는 오늘도 그렇게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해가 지고 달이 떴다.
아이에게는 한여름 밤의 루틴이 있다. 저녁밥을 먹고 창밖이 어둑해지면 아빠와 함께 그네를 타러 가는 것이다. 시원한 밤바람을 맞으며 그네를 타면 너무 신난다고 했다. 요사이 같은 루틴이 생겨버린 아이들이 많아졌는지 놀이터가 시끄러웠다. 마음이 평온해졌다. 희한하게 여름밤 창밖에서 들리는 아이들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 사이 나도 저녁 밥상을치우고 설거지를 마쳤다. 후다닥 혼자만의 시간을 사수하려들면 여지없이 현관문 도어록 소리가 들린다. 아무튼 눈치라고는 없는 부자지간이다.
간식으로 사과를 주려는데 아이는 그거 말고 하리보를먹겠다고 봉지를 만지작 거렸다. '아까 낮에도 단거 많이 먹었는데' 나는 또 망설였지만 알겠다고 했다. 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쫠깃쫠깃 쫀쫀하게 씹어 삼키는 아이의 두 볼이 귀여웠다. 이렇게 행복해하는 걸 두고 나는 뭘 그리 또 망설였을까.
망설임에는 끝이 없다. 아까 낮에는 좋아하는 사람의 책을 읽고 신이 나서 그분을 태그하고 피드에 올리면서 태그를 썼다 지웠다가, 그분이 부담스러워하실라나? 망설였고 또 다른 분께는 팬심의 댓글을 달다가 같은이유로 또 망설였다.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태그하고 나에게 댓글을 달아주면 나는 너무 감사하고 기쁜데 막상 내가 하려고 하면 왜 자꾸 의기소침해지고 망설여지는 것일까?
아이 학원을 픽업다니며 오디오북으로 들은 <시작의 기술>의문장이 떠올랐다.
'당신 삶에서 실망과 원망 후회 원망 분노
무기력을 경험한 곳이라면,
김 빠지고 뭔가 억눌린 감정을 느낀 곳이라면
어디든 기대가 숨어있다
그랬구나. 나의 망설임들에는 기대가 숨어 있었구나.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나의 행동 다음에 은연중에 기대하고 있었던 것들이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매사가 당신 뜻대로 되기를 바라지 마라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 에픽테로스 -
망설이지 마. 뭘 그리 망설여!
머릿속 기대를 버리면 모든 행동은 모든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