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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해방일지

나와 주변의 해방

by 문이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이렇게 충격과 의문으로 시작되는 정지아 작가의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참 재미있게 읽었다.

배경이 지리산 아래 전라도 구례, 냉전시대 빨치산들이 활발히 드나들었던 곳이다.

나의 고향도 지리산 자락이라 그런지 책에 나오는 사투리들이 구성지고 정겨우면서 책을 읽는 내내 고향 어르신들을 만난 기분이었다.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는 1948년부터 1952년 사이 빨치산으로 사셨다고 한다. 빨치산의 자식으로 낙인찍힌 작가는 국민학교 4학년 무렵 그것을 인식하면서 세계와 동떨어진 경험을 했단다.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 지역에 흔히 널린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이다. 허구이나 실재 경험했던 사람들의 삶이다.


이 책은 우익의 편도 좌익의 편도 들지 않는다. 한때 좌익이었던 사람이 우익과 어우러져, 우익이 승리한 세상에서 이데올로기를 떠나, 있는 그대로의 한 인간 존재로서의 삶을 보여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90년대 이전에 나왔더라면 금서가 되었을 것이다.

요즘 세상에 좌익과 우익이라니...

하지만 양극단은 우리나라 현실에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전라도 경상도 운운하면서 파랑과 빨강으로 이분법적 잣대를 드리우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 사회가 잘 어우러지고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이러한 구분은 사라져야 하기에 책 속 아버지의 삶이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인간과 이웃을 먼저 생각했던 아버지의 태도를 돌아보며 그의 주변 사람들은 갇혀있던 굴레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맛본다.


책의 구성은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을 기본 골격으로 하여 문상 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외동딸과 어머니가 주인공이 될 초라할 장례식장에 아버지와의 추억을 간직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시끌벅적한 장소가 된다. 그 사람들의 사연들을 접하며 딸은 마음으로부터 멀어졌던 아버지를 되찾고 어린 시절 받았던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린다. 또한 그의 사랑이 주변에도 번지고 녹아들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평생 군인으로 교련 선생으로, 그리고 조선일보 애독자로 살아온 박 선생 같은 이와 빨치산 동료들은 아버지 외의 어떤 접점도 없었다. 아니, 그 시절에 총을 겨눈 사이였다. 아버지와 오래 마음을 주고받으며 지낸 사람들 사이에도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축소판을 보는 기분이기도 했다. 다만 아버지의 지인들은 우리나라의 보수 진보와는 달리 언성을 높여 성토하는 대신 서로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신들 방식대로 아버지를 추도하는 중이었다. 묘하게 평화로웠다. 어쩌면 죽음으로써야 비로소 가능한 평화일지도 몰랐다. 어쨌든 아버지의 장례식장은 적당히 분주하고 평화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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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도 바깥일에만 열심인 아버지를 나무라곤 했었다. 아버지는 혁명까지는 아니지만 가족보다는 마을 일에 발 벗고 나섰고, 보증까지는 아니지만 불쌍한 이웃의 배고픔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쌀을 퍼다 주었다. 그로 인해 어머니는 많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느라 더 억척을 떨어야만 했다.


나의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삶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장례식 풍경과 지금의 홀로 남겨진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 책을 읽었다.

누구나 읽으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될 책, 아버지의 의미와 존재를 새롭게 재조명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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