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책을 읽으며 이반 일리치와 죽음의 여정을 함께했다. 생생하고 구체적인 장면들의 친절한 묘사는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학작품에서 많은 죽음을 보았다. 이방인의 뫼르소, 그리스인 조르바, 이어령 선생 등. 삶과 죽음은 하나이기에 삶을 말하다 보면 자연스레 죽음이 함께 따라온다.
"죽음이 이러한데 당신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고 작가들은 묻고 있다.
첫 장면은 죽은 이반 일리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그렸다.
"가까운 지인의 죽음 자체는 늘 그렇듯 부고를 접한 모두에게 내가 아니라 그가 죽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의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죽음은 이반 일리치에게만 해당하는 특수한 사건일 뿐 자기는 전혀 무관하다는 투였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 밀리의 서재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든 사람의 심리를 꿰뚫고 있다. 인간이면 가질 수 있는 솔직한 그들의 심경을 날카롭고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내가 죽은 후 사람들의 반응을 상상해 보게 된다.
'내 남편은 울겠지. 그러면서도 장례절차를 치르고 사람들을 맞느라 정신없으며, 죽음의 경위를 얘기하느라 말을 많이 하겠지.
만약 남편이 먼저 죽었다면 나는 또 어떨까? 처음에 당황스러워하다가 사회적 존재로서 관습대로 사람들을 대하겠지.'
죽음은 한 사람의 삶의 무대가 막을 내린 상태다. 그 존재는 점점 나와는 무관한 것이 되어갈 것이다. 그렇게 죽음은 인생을 허무하게 만드는 것임을 톨스토이는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마흔다섯 살에 죽었고, 고등 법원 판사였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의 여러 부서와 분과에서 경력을 쌓은 관리의 아들이었다. 그 경력이란 어떤 본질적인 직무 수행 능력이 딱히 없더라도 어쨌든 오랜 근속 연수와 관등 덕분에 쫓겨나지 않는 상황, 그리하여 일부러 고안해 낸 허구의 자리에 앉아 6000루블에서 1만 루블에 이르기까지 허구가 아닌 돈을 받으며 늙어 죽을 때까지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 밀리의 서재
이반 일리치는 금수저로 태어나 똑똑하고 활기차고 유쾌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남부러울 것 없이 산 사람이었다.
유년과 청년 시절에 열광했던 것은 모두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지나가 버렸다. 관능과 허영에 몰입했다가 급기야 고학년 때는 자유주의에도 심취했지만 전부 그가 감정적으로 정해 놓은 한도 안에서 그랬을 따름이다.
그는 검사가 되고, 판사가 되어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서 약자들에게 위선을 누리며 살았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 단장한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항상 그렇듯이 아무리 살기 좋은 집이어도 딱 방 한 칸이 부족하기 마련이고, 또 수입이 늘어나도 딱 얼마가, 그러니까 500루블 정도가 부족하긴 했지만 그래도 참 좋았다.
그 시절 그의 기분은 집 문제로 좀 짜증이 났지만 그래도 좋았다.(식탁보나 비단에 무슨 얼룩이 생기거나 커튼 줄이 끊어져도 신경질이 났다. 집 단장에 공을 많이 들인 만큼 조금만 훼손되어도 마음이 아팠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 밀리의 서재
대부분 인간의 끝없는 물질 추구의 욕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어떤 병명도 모르는 병에 걸려 통증에 괴로워하고, 그의 삶은 무너져 간다.
그는 의지할 데 없는 처지와 끔찍한 고독과, 사람들과 하느님의 잔혹함과, 하느님의 부재에 목 놓아 울었다.
'대체 왜 이 모든 일을 하셨습니까? 대체 왜 저를 이 지경까지 끌고 오셨습니까? '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고, 대답이 없음에, 아니 대답이 있을 수 없음에 눈물을 흘렸다. 다시 통증이 일었지만 꿈쩍하지도, 누구를 부르지도 않았다. "자, 올 테면 또 와 봐!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무엇을 위해서?"라고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이윽고 감정이 가라앉은 그는 울음을 그치고 숨도 죽인 채 정신을 집중했다. 음성으로 내뱉는 말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목소리에, 머릿속에서 들끓는 생각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는 듯 말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 밀리의 서재
인간은 죽음에 맞설 때에라야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는 것인가?
이반 일리치는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했던 것이 학창 시절의 우정, 희망, 한 여자를 향한 사랑의 추억이었으며 세월이 가면 갈수록 좋은 것은 더 줄어들었다고 느낀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았던 어린아이의 순수함에 닿아 있던 때가 기쁜 기억으로 남아 있는 듯하다.
육체적 고통이 끔찍하리라는 의사의 경고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육체적 고통보다 더 끔찍한 것은 정신적 고통이었고, 이것이야말로 그의 주된 고통이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 밀리의 서재
자기가 삶을 잘못 살아왔다는 생각.
직장도, 삶의 방식도, 가족도, 사교계와 직장의 이해관계도, 이 모든 것이 잘못되었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증오를 낳았다.
죽기 한 시간 전에 그는 구멍 속을 나뒹굴며 빛을 보았고, 자기 인생이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아직 바로잡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내와 아들이 불쌍하단 생각을 하게 되고 용서를 구하는 순간 죽음에서 해방되었다. 그들을 구원하고, 자신도 이 고통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단순한가.' 그러면서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고 죽음 대신 빛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기쁨으로 죽어간다.
'남을 구하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떠오른다.
톨스토이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주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질문을 하게 한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진정한 나로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진정한 나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인지 깊이 고민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