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지난해 후반부터 거의 매일 글을 쓰며 살고 있다. 무언가를 이렇게 오랜 기간 흥미롭게 해본 적이 없는 나에게 이것은 별스러운 일이다. 나를 이끄는 그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 어린 시절의 경험에 기인하는 듯하다.
지리산 자락 품에 아늑히 안겨있는 나의 고향 남원, 춘향이로 불리기를 간절히 원하지만 향단이로 불리는 여자들이 더 많았던 곳. 그곳에서도 버스를 타고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한 시간은 더 가야 했던 시골의 작은 마을에 나의 어린 시절이 있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큰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내가 여섯 해를 거의 매일 다녔던 아담한 국민학교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른이 된 지금이니까 아담하다고 하지 그때 아이의 눈에는 너무 먼 거리에 있는 너무 큰 학교였다. 작은 시골학교는 한 반 밖에 없어서 1학년 때의 친구들이 6학년까지 한 식구처럼 쭉 함께 가는 운명 공동체였다. 그때는 지금과 달리 선생님들이 대부분 남자였고 여자 선생님은 내가 5학년이 되어서야 처음 구경했다.
나의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집이 익산시에 있어서 가족과 떨어져 학교 뒤편 관사에서 사셨다. 내 기억 속 선생님은 아이들을 좋아해서 늘 웃는 얼굴로 자상하게 대하셨고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선생님을 잘 따랐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선생님 모습은 머리가 좀 벗겨지셨고 둥그스름한 얼굴에 안경을 끼셨다. 큰 체구에 통통하셨고 살짝 나온 배는 넉넉한 선생님의 마음 같았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더 커 보였을 수도 있겠다. 관사에서 직접 살림을 사셨던 선생님은 가끔 우리들에게 두부 심부름을 시키셨다.
"00야, 두부 한 모만 사다 줄래?" 하면서 백 원짜리 동전을 건네주시면 우리는 신이 나서 멀리 떨어진 가게까지 단박에 가서 두부를 사다 드렸다.
나의 아버지는 우리 자매들이 학교 다니는 내내 학교 육성회장을 맡으셔서 선생님들과 술 친구 하는 사이로 가깝게 지내셨다. 작은 동네라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집안 사정도 대충 아셨다. 나의 언니의 담임이 나의 담임이 되고 또 동생의 담임이 되는, 그래서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는, 서로가 결속되고 정이 오가는 시절이었다.
3학년 무렵부터 글쓰기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교내 글쓰기 대회를 준비하며 원고지 쓰는 법과 경험과 생각을 나타내는 글쓰기를 선생님께 지도 받았다. 붉은 선이 그려진 하얀 원고지에 짧은 내용의 글들을 썼다. 그리고 교육청에서 주관했던 걸로 기억되는 어버이날 기념 백일장에 선생님이 응모를 해 주셔서 상을 받게 되었다. 중간중간 부모님과의 대화를 각색해서 따옴표 안에 썼고 마지막 구절에 '아빠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라고 썼던 것 같다. 지금은 식상한 문구인데 80년대 초에는 괜찮았나 보다. 딸내미가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과 자신과 관련된 글 내용에 엄하다고만 생각했던 아버지의 얼굴에 진짜로 웃음꽃이 피어났다. 칭찬도 들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지금도 그 일은 어린 시절 기쁜 추억 중에 하나로 남아있다.
그때 이후로 작은 학교였기에 선생님들은 백일장에 항상 나를 앞세우셨다. 한번은 남원 시내의 '만인의총'에서 열린 어린이 백일장 사생대회에 참가하였다. 결과는 기억이 안 나는데 대회를 마치고 선생님이 사 주신 처음 먹은 짜장면은 기억이 난다. 시내에 나가 본 적이 거의 없는 아이는 넓은 도시와, 검은 짜장면의 생소함과, 그 식당에서 본 작은 텔레비전 속 만화영화가 인상적이었다. 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이 장면들도 가물가물해져 간다. 그래서 글을 쓰나 보다. 소중한 기억들을 곁에 매어 놓으려고.
4학년 무렵 선생님은 댁이 있는 익산시(그 당시 명칭은 이리시였다.)로 전근을 가셨다. 그때부터 몇몇 친구들과 나는 꾸준히 선생님께 편지를 썼고, 선생님은 맡고 있는 반 아이들과 펜팔도 맺어주셨다. 나는 유일하게 제일 오랫동안 편지를 썼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께서 늘 답장을 해 주셨기 때문이다. 그 편지들은 오래도록 간직하며 잊고 살다가 한 번씩 이사하거나 정리할 기회가 생길 때 꺼내 읽었다. 그리고 언제인지 기억도 없이 그 편지들은 내 곁을 떠났다.
편지에는 늘 '사랑스러운 공주님! 00야'라고 불러 주셨다. 커다랗고 시원스럽게 뻗어나간 붓글씨 같은 글씨체에는 선생님만의 호탕함이 담겨 있었다. '수줍게 웃는 너의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미래의 꿈나무로 밝게 자라렴.', '다독, 다작, 다상량 하면 너는 작가가 되는 꿈을 꼭 이룰 거야!' 같은 문구들이 기억난다. 선생님의 이런 관심과 응원으로 그 당시 소녀는 막연하게 작가의 꿈을 키우며 성장했다.
그러던 중 꿈꾸는 소녀의 마음 문이 닫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 무렵 언니가 결핵에 걸린 것이다. 그 시절에는 결핵이 많이 돌았다. 언니 이야기를 선생님께 썼고, 선생님은 걱정과 위로와 언니에게 용기를 내라고 전하라는 내용의 답장을 주셨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편지를 읽고 왜 언니 얘기를 했냐며 마구 화를 내셨다. 소녀는 무섭고 당황스러웠다. 그 병이 전염된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유를 알지 못 한 채 소녀는 혼자 생각했다. '세상은 친한 사람에게도 솔직하게 다 말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 그 후로 아버지가 신경 쓰여서, 진실한 글을 쓸 수가 없어서 선생님께 더 이상 편지를 하지 않았다. 소녀는 날개를 접어버렸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 나는 작가를 꿈꾸었고 선생님은 늘 내 꿈을 지지해 주셨다. 수줍고 내성적이기만 했던 어린 소녀가 마음껏 마음을 꺼내 글을 쓰며 자유로웠다. 이 글을 쓰며 소녀에게 꿈과 희망을 주셨던 키다리 아저씨 같았던 선생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이제 여든을 넘겼을 노인이 되셨겠지만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웃고 계실 것 같다.
세월을 뛰어넘어 어른이 된 소녀는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는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글쓰기 지도도 하며 자신의 이야기도 쓴다. 어린 시절 선생님께 받은 사랑은 우리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칭찬의 힘이 얼마나 센지 몸으로 체득했기에 아이들에게도 적용시키려 애를 쓴다.
살면서 선생님 바람대로 살지는 못했다. 국어 국문학과에 진학했지만 글을 쓰지도, 책을 많이 읽지도 않았다. 그냥 사느라 바빴다고 핑계를 대어 본다. 나이가 들어가며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뒤늦게 독서의 맛을 알아간다. 문학작품에 감동하며 그런 글을 쓰고 싶어 흉내를 내 본다. 이제 어릴 적 나를 소환하여 글 쓰는 자유를 만끽하며 살련다. 나의 글쓰기에 더 이상 방해꾼은 없으며 지지자만 가득하니 이 얼마나 감사한가.
접어두었던 날개를 다시 펼쳐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