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 마지막 회를 보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아버지 양관식이 마지막을 준비하며 병상에서 딸에게 어머니를 부탁할 때 금명이가 펑펑 우는데 나도 같이 울었다. 딸의 태양이었던 아버지, 그 아버지와의 이별 앞에서 '아직 덜 컸다며 더 키워놓고 가라'는 딸의 애절한 목소리에 감정이입이 되었다.
대부분의 자식들은 부모가 늙어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죽음을 그리게 된다. 부디 오래도록 편안하게 지내시다 가족들과 잘 이별하고 돌아가시길 염원한다.
나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한때 술과 사람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아마 작은 산골 마을에서 인정 많기로는 1등이었을 아버지. 학교 육성회장으로, 마을 이장으로, 산림조합장으로 지내며 그 활동에 집안 재산을 쏟아부으셨다. 불같고 대쪽 같은 성격에 자기주장이 강하셨다. 정직이라는 가치를 최고로 두고 물심양면으로 공동체를 위해 일했으니 늘 사람들이 따랐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가정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와는 잦은 다툼이 있었다. 한때는 주사에 폭언에 가끔 폭력도 행하셔서 어머니와 딸들은 늘 아버지의 기분과 음주 상태에 촉을 세워야 했다.
그 시절의 아버지는 무섭고 지겹고 싫기만 한 존재였다. 딸들은 어머니만 불쌍했고 어머니 편만 들었다. 아버지는 스스로 외로움을 자처하셨다.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잘했던 것도 당연히 있었을 테지만 안 좋은 기억이 너무 커서 그런 것들은 다 묻히고 말았다.
나도 나이가 들어가며 아버지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은 잊혀간다. 결혼하고 아버지 통제에서 벗어난 지도 오래되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8년째 혼자 지내시는 아버지가 이제는 안쓰럽기만 하다.
배롱나무줄기처럼 드러난 뼈,
즙이 다 빠져버린 매실청 속 매실처럼 쪼글쪼글한 피부,
흔들리는 다리로 간신히 지팡이에 의지하는 걸음,
불룩한 주머니에서 모든 것을 꺼내 버려 작아진 듯한 체구,
이런 노인의 모습은 마치 커다랗고 탐스러웠던 감이 말라비틀어진 곶감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나도 결국은 그런 노인의 길을 가겠지. 그것이 순리라지만 아버지의 모습 자체만 봐도 안타까움이 몰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 시절로 되돌아간다면 상처 많은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싶기까지 하다.
알고 보면 인생은 다 불쌍하다. 단군 신화에 보면 환웅이 벌거벗은 인간이 불쌍해 그들을 도와주라고 환인을 세상에 보내지 않았던가. 하느님도 인간을 구원하러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거친 세상을 헤쳐 나가야 할 운명인 거다.
아버지의 지난 삶을 엄마와 언니들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자세히 알지 못했다. 지난번에 아버지와 식사를 마치고 공원 산책을 하며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어땠어요? 6.25 때는 피난을 가셨어요?"
아버지는 이제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짧게 대답을 하셨다. 구체적인 답을 얻기 위해 세세하게 질문을 해서 기억을 살려내야 했다.
"순사들이 어떻게 했어요?
피난은 어디로 가셨어요?
서당에서는 어떤 공부를 했어요?"
들어보니 아버지도 태어나서부터 참 힘들고 불행한 삶을 사셨다. 온전치 못한 삶이 자신이 이룬 가족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거였다.
아버지는 1938년에 태어나셨다. 그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고 창씨개명도 당하셨다고 한다. 나라의 광복을 보셨고 전쟁 때 피난을 가셨다가 돌아와 보니 마을은 온통 불에 타 있었다고 했다.
"내가 어렸을 때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셨은께. 계모 밑에서 눈칫밥을 먹고 살았제. 근디 느그 할아부지도 얼마 못 살고 가서 두 남동생을 내가 책임져야 했제. 느그 작은 아부지들은 참 말도 안 듣더구만. 근디 큰 집이 아들이 없어서 내가 양자가 되었어. 그때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서당에서 공부하고 했었제."
주경야독이란 책에서만 나오는 사자성어인 줄 알았다. 집안의 가장이 되어 경제를 책임져야 했던 팍팍한 삶. 결혼하고 동생들 키워서 분가시키고 하느라 자신의 삶은 돌보지 못했던 아버지였다.
얼마 전 큰 언니와 통화를 하며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난 어렸을 때 아버지가 싫고 무섭기만 했는데 언니는 어땠어?"
큰 언니는 나보다 열다섯 살이 많다.
아버지가 20대 초반에 언니가 태어났으니 젊은 시절의 아버지 모습을 제일 잘 알 테다.
"아버지가 나 어렸을 때 잘해 줬던 거 몇 가지가 생각나지. 내가 아팠을 때 아버지가 산동면까지 가서 약을 사다 줬어. 우리 동네는 약국이 없었으니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다녀오신 거야.
그러고 한 번은 중학교 1학년 때 일이야. 학교에 육성회비를 내야 해서 아버지가 준 돈을 들고 통학버스를 탔지. 그런데 남원 시내에 도착해서 보니 없어, 누가 빼간 거야. 난 혼나면 어떡하지 노심초사했는데 아버지가 두 말 않고 그냥 주더라."
"진짜? 우리가 그랬으면 난리를 쳤을 거 같은데 언니는 첫 딸이라 그랬나?"
"글쎄, 그리고 그때는 산에서 땔감을 구해야 했잖아. 내가 나무를 해서 머리에 이고 오다 무거우면 산소 자리에 놓아두었거든, 그러면 아버지가 마중 나와서 지게에 지고 가곤 했어, "
"아이고, 고생했네."
"나 국민학교 때는 우리 동네에 학교가 없어서 산등성이를 넘어서 학교를 다녔거든. 같이 다녔던 우리 친구들이 남자 12명, 여자 12명이었어. 그런데 얘네들이 왕따 놀이를 한 거야. 날마다 한 애씩 돌아가며 말도 안 시키고 아는 척도 안 하는 짓을 놀이처럼 했는데 내 차례가 된 거지. 그래서 학교 가기 싫어서 늑장을 부리니 아버지가 왜 그러냐고 묻더라. 아버지가 얘기를 다 듣고는 나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담임 선생님을 만났어. 내 친구 오빠가 담임이었는데 아버지 말에 왕따가 사라졌지. 그리고 그 길로 나를 시내에 데리고 가서 빨간 가죽 가방을 사 줘서 메고 다녔어. 그런데 나중에 어른이 돼서 오빠가 담임이었던 그 친구가 그러더라. 내가 너무 부러웠다고. 그 빨간 가방도 부러웠고, 우리 쌀밥 먹을 때 자기네는 보리밥 먹었다고."
아버지는 나이 서른에 셋째 언니를 얻었다. 언니가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 부모님은 거의 아들일 거라고 확신에 차서 보약도 지어먹고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배는 아들을 연상시키는 듯 너무나 불렀고, 연달아 딸 둘을 낳았으니 세 번째는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단다. 제일 결정적인 것은 점쟁이도 아들이라고 예견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밖으로 나온 아이는 어머니 살아계실 때 표현에 의하면 가래떡처럼 하얀 피부에 둥근 달덩이처럼 포동포동한 것이 완전히 장군감같은 딸이었다고 했다. 실망이 컸던 아버지는 나가서 술만 드셨고 어머니는 하도 속이 상해서 방구석에 밀쳐 뒀다고 했다. 어머니에게 이 얘기를 들은 언니는 속이 상해서 어느날 속마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엄마, 난 그 얘기 들을 때마다 너무 서운해. 아이를 낳아 놓고 그렇게 했다니 존재감도 못 느끼겠고 진짜 속상하다니까.
" 그랬냐? 야, 말 마라. 느그 아부지가 그렇긴 했어도 너를 엄청 아끼드라. 니가 갓난 아기였을 때 너를 데리고 밭에 갔는디 얼마나 니 생각을 허는지. 너를 나무 그늘에 눕혀놓고 일을 허는디 햇빛이 너한테로 오믄 그늘로 얼릉 옮겨놓고 또 쪼께 있다가 해가 움직이면 또 옮겨놓고 계속 그랬당께. 허허."
언니들 얘기를 듣는데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자상한 아버지상이 떠올랐다. 우리 아버지에게 저런 면이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우리 아버지가 그런 아버지셨다니 자랑스럽고 또 뿌듯했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농사일은 뒷전으로 하고 대외적인 일만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나는 큰 언니 얘기에 또 한 번 놀란 적이 있다.
"아부지가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했는데. 우리 집에 머슴을 두고 살았을 때 같이 일하는데 아부지는 손도 빠르고 솜씨도 좋은 데다 일도 참 야무지게 하셨어. 그런데 여러 가지 일을 맡으면서 술 대접하고 대외적으로 할 일이 많아지면서 집안에 신경을 못쓰게 된 거지."
한창때를 그렇게 보낸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가난과 술이었다. 아버지가 여러 직책을 안 맡고 가족과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이기적인 생각이 스친다.
그 당시 아버지는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았겠지만 가세는 기울고 농사일이 많은 어머니와 언니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애들 차비가 없어서 창피함을 무릅쓰고 작은 어머니께 돈을 꾸러 다녔던 어머니, 억척스럽게 살 수밖에 없었던 돌아가신 어머니의 인생이 또 안쓰러워진다.
아버지의 잘 나갔던 그 세월이 어쨌든 흘렀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따라 낯선 도시로 와서 남은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말 그대로 뼈 빠지게 고생을 하셨다. 열악한 공장에서, 좁은 경비실에서 자신을 챙기지 못했던 지난날의 대가를 치르는 듯 희생을 감내하셨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 인생의 뒤안길에 서 계신다. 몸도 마음도 작아져 외로운 하루하루를 살아내며 엄마 곁에 묻힐 날만 기다리신다. 우리 자식들은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만 봐도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