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화 글쓰기의 시작

벽이 있다며 울던 여자

by 문이

"맑은 아침 공기는 수없이 투명한 바늘이 되어 피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

이따금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강 너머 펼쳐진 나무숲 안쪽에서보다 가혹한 계절의 도래를 예고하는 날카롭고 통절한 소리를 냈다.

...

매일의 혹독한 추위는 내게 색다르고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지금까지의 알던 것과 성분이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신선한 감촉이 느껴졌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하루키 330쪽






90년대 초반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나는 사물놀이 동아리에 들어갔다.

바람의 언덕. 야외 주막 역할을 톡톡히 해냈던 인문관 앞 잔디밭을 선배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곳에서 우리 새내기들은 꽹과리를 하나씩 들고 나란히 서서 동아리 전통에 따라 선배들이 꽹과리에 가득 부어준 하얀 막걸리를 마셨다.

처음 마셔 본 막걸리의 위력은 대단했다. 그 하얀 액체가 내 속 깊은 어딘가에 10년도 넘게 들어앉아 있던 단단한 흙덩이를 뜨겁게 풀어냈다. 그것은 눈물, 콧물, 울부짖음의 형태로 쏟아져 나왔다.

"선배, 사람들 사이에 벽이 있어요. 벽을 허물어야 해요. 흐흐흑."

술주정처럼 그 말을 여러 번 했다. 술을 빌어 무의식에 갇혀 숨어있던 내가 세상에 나오고자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자유로웠던 대학 시절 나를 오롯이 돌보지는 못했다. 갑자기 주어진 자유를 다루는 것이 서툴렀다. 여태껏 내 의지로 살아 본 적이 없었잖은가? 학교라는 시스템 안에서 부모님과 선생님 말씀에 순종하고, 착한 아이로 인정받으며 늘 개근을 했던 아이. 안전한 울타리라는 착각 속에서 늘 자신을 숨기며 그냥 무난하게만 살던 아이가 스스로 길을 찾는데는 여전히 벽이 있었다.






"이렇게 나나 철이 엄마나 딴 방 여자들이나 남보다 잘 살기 위해, 그러나 결과적으론 겨우 남과 닮기 위해 하루하루를 잃어버렸다. 내 남편이 열여덟 평짜리 아파트를 위해 칠 년의 세월과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상실했듯이."

<닮은 방들> 박완서



경제 활동을 하고, 결혼을 하고, 육아를 하고... 느리다고 생각했던 세월은 지나와 보니 느린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은 눈앞에 이익을 좇아 순간들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남들과 비교하고 비교당하며 찌그러진 채 여전히 무난한 하루들을 보냈다. '나'를 찾아야겠다는 열망이 없었기에 그냥 주어진 삶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생활들의 반복이었다. 예전의 그 습성이 바뀔 리 만무했다.





비후성 심근병증. 이것은 엄마 쪽 유전자가 가진 치명적인 희귀 질환이다. 내가 중년의 나이가 되니, 주변의 가족과 친척들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큰 이모, 작은 이모, 나의 어머니, 사촌들, 조카까지. 이 무서운 유전병은 세상을 붙들고 있는 한 줄기 인연의 끈에 칼날을 들이댔다. 한 심장 전문병원에서 나의 인연들이 생을 마감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지? 이 병원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죽음이란 무엇이고 산다는 건 무엇일까?', '죽은 후의 세계는 존재할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답을 찾고 싶었고 시간이 더없이 소중해졌다.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싶은 열망들은 관련 유튜브 영상들을 끌어당겼다.

영상을 접하며 인문학과 고전이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추천 도서들을 찾아 읽기도 하고, 남은 생을 값지게 사는 사람들의 에세이도 마음에 담았다. 문학 작품들을 찾아 읽으며 삶의 향기에 전율을 느꼈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다'라는 흔한 말에 정말 그렇다고 맞장구를 치게 되었다.


이 감동과 생각은 기록으로 이어져 1년 동안 꾸준히 독서리뷰로 블로그에 올려졌다.


그리고 1년 후, 블로그 글쓰기 100일 챌린지에 도전을 했다.


나는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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