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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대호 Aug 24. 2021

버닝

버닝(2018) / 이창동

우리네 젊은이들은 과연 청춘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삶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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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지망생 종수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어릴 적 동네 친구였던 해미를 만나고 그녀와 가까워지며 사랑을 느낀다.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올 동안 고양이를 봐달라는 해미, 종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고양이에게 사료와 물만 채워준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로부터 정체불명의 남자 벤을 소개받고 종수의 일상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영화는 맥거핀과 메타포로 가득하다. 감독은 줄거리 곳곳에 널브러진 장치들의 의미를, 아니 그 실체조차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게 설정해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끝까지 명쾌한 해답이 부여될 수도 없는 이야기. 관객들 저마다의 관람평과 해석이 상이하고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이다. 나도 나름대로의 이야기조차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버닝>에 대하여 느낀 대로 글을 작성해본다. 물론 어디에도 답은 없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생계를 위해 유통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종수는 20대 평범한 젊은 층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입이 반쯤 벌려진 채 멍한 표정과 늘어져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는 그의 무기력한 성격을 보여준다. 불같은 성격으로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 중인 아버지, 어릴 적 집을 나간 어머니, 몇 년 전 결혼해 집을 떠난 누나, 글을 쓰고 싶지만 정식 작가가 되지 못한 자신까지. 순탄치 않은 환경 속에서 지속적으로 외롭게 세계와의 대립을 경험하며 살아온 종수는 분노와 무기력을 내면화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이러한 종수의 삶은 청년 실업, 세대 갈등, 계급 차이 등의 다양한 문제를 포괄하는 이른바 ‘청년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현대 사회의 젊은 층의 일상과 닮았다. 치열하게 살아오며 가까스로 대학 졸업장을 마련했지만 다음의 목표와 꿈을 이루는 것이 만만치 젊은이들. 어쩌면 마땅한 목표와 원대한 꿈은 갖는 것조차 쉽지 않은 그들. 이 시대의 수많은 종수는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카드 빚으로 가족과 등지고 친구도 없이 홀로 아르바이트하며 쓸쓸히 지내는 해미는 ‘없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그의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허전함으로 가득한 인물이다. 팬터마임과 아프리카 여행, 고양이, 우물까지 그녀는 영화 내에서 여러 존재에 대한 의문점을 배양시킨다. 돌봐달라는 고양이 보일이는 존재하는 것일까, 어릴 적 빠졌다던 우물은 존재했던 것일까, 그레이트 헝거를 자처하더니 결국 인생의 의미를 찾긴 했을까, 그래서 결국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어느 순간 나타나 무기력한 삶에 활기가 되어주는가 싶더니 말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해미. 종수에게는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과 추억들이 하룻밤의 꿈과 같았을 것이다. 달콤하고 가슴 뛰었지만 정신 차려 보니 결국 혼자 남아 기억을 상기할 수밖에 없을 뿐이다. 해미는 이 시대 수많은 종수들이 잃어버린 꿈과 희망에 대응된다. 저마다 어느 순간 갖게 되었던 목표와 꿈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장래희망으로써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으로서 해미는 종수로 하여금 의문과 의심을 가득 안겨주고는 사라져 버리곤 한다. 그리하여 수많은 종수들은 의미를 깨닫지도 못하고 의문을 가득 안은 채 수수께끼 같은 세상을 그저 살아갈 뿐이다.


마땅한 직업을 갖고 있지도 않지만 고급 빌라에 살고 고급 스포츠카를 몰며 풍족한 개츠비의 삶을 사는 벤. 그는 종수와 대립을 이루며 이야기 속 계급 갈등의 한 축을 이루는 인물이다. 반포 고급 빌라와 파주 시골 마을의 판잣집, 번쩍거리는 포르쉐 911과 녹슨 봉고 트럭, 지루해하는 하품과 사랑으로 채워진 열망의 눈빛이 그러하다. 종수에게는 단 하나뿐인 사랑인 해미의 마음을 빼앗고 고급진 포르쉐의 압도감으로 해미를 빼앗아가는 존재. 삶의 의미를 구한다는 헝거의 춤을 추는 해미를 지루해하고 결국 그녀가 사라지자 다른 여자로 그 자리를 대체하는 존재. 해미를 사랑한다는 종수의 말을 비웃듯이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며 이해되지 않는 말로 종수의 마음을 갖고 노는 존재. 종수의 마음속에 분노를 쌓이게 하는 존재이다. 해미가 사라진 후 비닐하우스가 타버리듯 해미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고 말하는가 하면 화장실 서랍 속에 해미의 것을 포함한 여성들의 물건들이 쌓아두고, 어느 순간 보일이라 추정되는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하는 등의 여러 은유는 종수의 마음속에 그가 해미가 사라진 원인일 것이라는 의심을 키우게 한다. 물론 그가 실제로 해미를 죽였는지는 모른다. 그저 대마에 취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던 것일 수도 있고, 헤어진 여자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애처로운 모습이었던 것일 수도 있으며, 버려진 고양이를 거두는 연민이 가득한 모습일 수도 있다. 다만 '재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는 벤의 대사를 통해 그는 종수의 마음속에 의심의 여지를 충분히 남겼다는 것이다. 영화는 끝내 이에 대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우리 종수들의 의문에도 해답이 따로 주어진 것은 없다.


젊은 세대의 분노와 무력감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걱정 어린 시선이 담긴 영화. 분노의 대상도 원인도 알지 못한 채 끝내 무력감에 빠져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지금껏 영화 <버닝>을 다섯 번, 원작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네 번, 영화의 소재가 되는 포크너의 소설 <헛간 방화>를 한 번 감상했다. 처음 영화관에서 관람하고 작품에 매료되어 내가 이 작품에 지금껏 부은 관심의 표출이다. 영화를 두 번, 세 번 볼 때까지는 위험할 만큼 무기력해져 마음을 바로잡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작품을 반복해서 감상할수록 무력감과 인생에 대한 회의감 등 모호한 듯 알 수 없이 나를 괴롭히던 감정들이 구체화되어 표현된 것을 깨닫고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나중에 다시 감상을 했을 때, 혹은 얼마 후 다시 생각했을 때에는 어떤 느낌을 받을 수 있을지.


젊은이들이여, 얼마나 의문스러운가, 얼마나 불안하고도 두려운가. 우리네 인생은 세상에 수많은 의문을 던지다가도, 그러다 해미를 만나 불타오르는 청춘을 이루나 싶다가도, 수많은 벤을 마주하기 십상이지 않은가. 이해할 수 없는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삶이 얼마나 힘겨운가. 그러나 포기하지 말자, 수많은 분노와 무력감을 단지 억누르지만 말자, 옷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글을 쓰며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인생을 써 내려가는, 그렇게 칼의 날을 세우는 종수의 마지막 의지를 갖자. 파란만장한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청춘을 살아가자.


행방이 묘연한 해미를 찾기 위해, 벤을 향한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쓰며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는 종수처럼 다시금 나의 이야기를 펼쳐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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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텐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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