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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a Jan 16. 2022

Via Negroli 2, Milano

첫사랑, mia bebè,   빨간 장미와 몽글몽글한 로맨스

밀라노에 온 지 한 달 반이 조금 넘었을 즈음이었다.


강의가 끝나고 폰시는 시에스타로 연락이 되지 않을 때 두오모와 브레라를 둘러보고는 했다. 다양한 페이스츄리 가게들과 약국, 세포라, 백화점을 둘러보고는 했는데, 이 마저도 질려 독특한 향수 가게들과 중고 카메라 판매점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다 발견한 곳은 두오모 근처에 위치한 중고 카메라 판매점으로 깔끔한 공간이었다. 첫날은 차마 홀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기웃거리다 돌아왔다. 아직 미숙한 이태리어 실력으로 괜히 들어갔다 사기당할까 혹은 무시당할까 무서웠다.


이후 틈틈이 필름 카메라에 대한 이것저것을 찾아보고 구매를 할 경우 어떤 점들을 유의해서 확인해야 하는지도 살펴보았다.

봐 두었던 그곳은 따로 온라인 사이트도 있었는데, 다양한 품질 보장된 중고 카메라들이 있었고 개중에는 나의 첫사랑이 들고 다니던 필름 카메라도 있었다. 캐논 AE-1.


250유로가량 했었나. 2.8F 50미리 렌즈까지 세트로 구성되어 판매 중이었다.

마침 티끌 모아 티끌로 모았던 돈에 딱 맞는 가격이었다. 오빠가 그 필름 카메라로 담았던 장면들은 따뜻하고 기분 좋은 사진들로 기억했다.

완전 매뉴얼식 카메라로 사진 한 장을 찍을 때 오래 걸리던 모습도 그만큼 신중해질 수 있던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비슷한 다른 카메라들도 있었지만 마음과 추억에 이끌려 그 제품으로 결정했다.


해외에서 홀로 (당시에 나에게는) 큰돈을 (심지어 일시불로) 결제하는 경험은 처음이어서 잔뜩 긴장한 채 매장에 들어섰다.


우리나라 중고 카메라 상점들, 주로 을지로 충무로, 혹은 남대문에 위치한 상점들 특유의 작은 공간과 어두운 조명의 분위기와 달리 이곳은 매우 밝고 직원들도 많았다. 아 물론 공간이 크지는 않았다. (우리나라 상점들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들어서니 직원들은 여느 이태리인과 같이 살가웠다.


‘Ciao! How can I help you?’


심지어 우려했던 바와 달리 영어도 나름 능숙하게 했다.


처음부터 제품을 찾기보다는 이것저것 둘러보았다. 오래된 폴라로이드 카메라도 있었고, 다양한 형태의 필름 카메라들, 따로 분리해 놓은 라이카 시리즈들도 보였다. 사실 갖고 싶은 카메라는 라이카였지만… 내 분수에 맞지 않는 카메라였다.


그렇게 한참을 둘러보던 중 마음에 담아두었던 캐논 카메라가 눈에 들어왔다.


서걱서걱 돌아가는 초점 링 외에 이상은 없어 보였다. 철 덩어리 마냥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무게감이 있었으며 차가웠다.


‘이 아이.. 갖고 싶어요!’


반짝반짝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직원은 웃으며 친절하게 카메라 확인을 함께해주었고, 기본적인 작동법들도 설명해주었다.


그렇게 구매하게 된 내 카메라. Mia bebè.


이 아이로 담은 유럽 생활과 여행들은 그다음 해가 될 때까지 필름에 담겨 타임캡슐처럼, 미스터리 박스처럼 현상되지 않고 기록되기만 했다.


투박한 셔터 소리, 매번 돌려야 하는 레버, 서걱서걱 돌아가는 초점 링, 자꾸만 빠지는 홀더 캡. 처음에는 불안하고 번거롭고 짜증 났지만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정겹고 사랑스러운 mia bebè.


어딘가 아름다운 장소에 갈 때, 이 아이에게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어서, 또 이 아이의 눈을 통해 볼 수 있는 그 광경이 궁금해 항상 함께 한다.






밀라노에서 몽글몽글한 로맨스가 없던 건 아니었다.


하루는 폰시, 마커스와 두 번째 트레블링 바에 갔다. 처음보다 넓은 바에서 행사를 하고 있었고 더 많은 학생들이 있었다. 한두 잔 걸치다 보니 우리는 각자 흩어져 새로운 무리에 들어가 새로운 친구들과 마시기 시작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이야기하다 다시 마커스와 마주쳤다. 마커스는 들뜬 얼굴로 나를 반겼고 함께 있던 친구에게 나를 소개해주었다.


로브로.


다비드 상이 살아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190의 큰 키에 다부진 몸, 넓은 어깨, 완벽한 비율, 각진 턱, 깊은 눈, 금발 머리까지. 설레거나 두근거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 사람 같아 그 사람이 이야기하고 움직이는 하나하나가 신기해 쳐다보게 되는 그런 기분이었다.


로브로는 과묵하고 시크했다.


‘Oh. Hi. I’m Jiho.’


‘Hey, nice to meet you.’



그런 로브로가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우리는 맥주를 마시며 꽤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커스가 사라진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크로아티아에서 온 로브로는 마커스와 같은 법대생이었고 그 과에 어울리게 정직한, 정의로운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대화는 새로운 사람과 그렇듯 평범하고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170인 내가 그 앞에 서서 올려다보며 눈을 마주하는 느낌, 높은 코 양 옆에 위치한 깊은 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신기함이 설렘으로 변했다. (내 기준에) 잘생긴 사람과의 대화가 처음이었기에 하염없이 빠져들어갔다.


대화 주제가 바닥날 무렵 폰시와 마커스가 함께 나타났고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잠깐의 소개 시간 후 조금 더 즐기다 귀가했다.



로브로에게 빠져버려 부끄럼 많은 소녀가 되어버린 나는 폰시에게 매일같이 로브로 이야기를 했다. 하루 종일 했던 건 아니지만 말을 하다 보니 문득문득 그렇게 된 것 같다. 로브로 이야기를 하면 나도 모르게 볼이 빨개지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폰시는 로브로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했다. 잘 모른다고 둘러대며 이야기를 들은 체 만 체 하다가 로브로는 별로인 것 같다고 했다. 귀여운 질투였지만 아랑곳 않고 한참을 더 이야기하고는 했다.



하지만 따로 연락을 하고 지내는 건 아니었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그때 나와 함께 있어준 로브로에 고마울 따름이었고 그 이상으로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려 하지는 않았다.


로브로와는 겹치는 강의가 전혀 없어서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지만 일주일에 딱 두 번, 이탈리아어 수업을 마치고 본 캠퍼스 앞에서 학생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눌 때 마주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로브로가 반갑게 다가와 인사를 나눴고 그 옆에는 마커스가 있었다.


로브로는 외향적인 성향은 아니었다. 두오모 근처에 위치한 기숙사에 머물렀고 이전에 잠시 만나서 함께 놀았던 ‘Rafik’ 라픽이라는 친구와 함께 방을 공유했는데, 라픽에 의하면 주로 방에 머물며 책을 읽거나 남학생들과 운동을 하며 시간을 즐기는 편이었다. 해서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로브로를 다시 만날 기회는 없었다.


그러던 중 처음 만난 지 일주일 정도가 흐른 후였다. 이탈리아어 강의를 듣던 도중 마커스에게 문자가 왔다.


‘오늘 수업 끝나고 나빌리에 가서 술 한잔 할래?’


‘그래? 폰시도 오는 거야?’


‘폰시한테 연락은 해놨고, 로브로도 온대!’


로브로! 오. 그 문자를 본 순간부터 강의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재빠르게 강의실을 나와 캠퍼스 입구로 달려갔다. 아니, 사실 달려가던 중 이성을 되찾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침착한 척하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마커스와 몇몇 친구들이 서 있었고 저 멀리서 폰시도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로브로는 보이지 않았다. 실망감을 최대한 감추려 하며 기웃기웃거렸지만 여전히 그는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건물에서 나오는 학생들은 없어 보였다.


‘슬슬 갈까?’


폰시와 마커스는 이미 화이트 와인을 들고 있었다.


‘어.. 근데 로브로도 온다고 하지 않았어?’


‘로브로가?’ 폰시가 말했다.


‘응 로브로는 숙소에 짐 놓고 온다고 했어. 우리 먼저 가자.’


다시 심장이 콩닥콩닥거렸고 폰시는 그다지 기뻐 보이지는 않았다.


로브로를 기다리며 강가에 앉아 마시던 화이트 와인.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작은 강가 혹은 냇가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 크기의 물을 바라보며 소소하게 대화하는 이 시간은 고요하고 행복했다.



여느 때와 같이 바닥에 앉아 떠들고 있을 때로브로가 등장했다.


그는 밝은 미소로 다가와 가벼운 포옹을 하며 인사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동그랗게 둘러앉게 되었고 로브로가 가져온 와인 한 병을 더 추가해 마셨다. 로브로는 내 옆에 앉아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했다. 첫날보다 로브로는 한결 편한 표정이었고 나름 많이 웃기도 했다.


단란하게 떠들며 시간을 보내던 도중 장미 다발을 든 아랍 상인이 다가왔다.


‘원 유로? Per la bella signora?’


‘Oh, non per me. Haha, Scusi.’

(아! 저는 필요 없어요. 하하 미안해요.)


돌아서는 상인을 로브로가 붙잡았다.


‘Un euro?’


상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빨간 장미 한 송이를 내밀었고 로브로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졌다.

이를 본 마커스와 폰시도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고 각자 동전을 모아 금세 1유로를 만들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로브로에게 장미를 건네받은 나는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장미와 로브로와 친구들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Grazie mille! Oh my gosh. It’s so beautiful!’


모두들 내 반응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재빨리 빈 화이트 와인 병을 잡아 장미를 꽂아 넣었다.


‘이거 이렇게 들고 갈 거야! 잘 간직할게 정말 고마워.’


마음에 무언가 일렁이는 기분이었고 1200원짜리 장미꽃 한 송이로 소중한 사람, 소녀가 된 기분이었다.

로브로 뿐 아니라 친구들 사이에 있으며 사랑받는 기분과 든든한 오빠들을 둔 기분이 들었다.


꽃을 만지작 거리며 다시 대화를 나누다 로브로가 하얀 무언가를 건넸다.





그가 사 온 술 영수증으로 만든 미니어처 장미였다. 크고 시크한 로브로가 이런 장미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콩콩콩콩 괜히 간질간질하고 두근거린다.


‘우와!! 너 이런 것도 할 줄 알아? 손재주 진짜 대단하다!’


어린아이 마냥 꺄 소리를 지르며 장미 위에 꽂고는 바로 핸드폰에 기록했다.


행복하고 설레는 로맨틱한 밤이었다. 내 20대에 진정한 순수한 설렘을 느낀 날로 꼽히는 날이다.


훗날 폰시는 그 모습을 보며 로브로의 머리를 돌로 내리치고 싶었다고 했다. (과격한 표현이지만, 정말 그가 말한 그대로를 적었다.) 당연히 설렐 상황이지만 엄청난 질투심에 휩싸였다고 한다..


우리는 만취할 때까지 머무르지는 않았다. 와인 세병 정도를 비우고는 귀가했다. 이날 저 와인병과 장미, 미니어처 장미까지 고스란히 세트로 가지고 왔다.


어쩌다 보니 병과 미니어처 장미는 잃어버렸지만 장미는 드라이까지 해서 밀라노를 떠나는 그날까지 고이 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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