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의 생일파티, 두 번째 키스
며칠 후 마커스의 제안으로 마커스와 로브로를 포함한 법대생 무리의 Turin 당일치기 여행에 함께하게 되었다.
Turin은 밀라노의 서쪽에 위치한 작은 도시다. 별다른 정보 없이 쫄래쫄래 따라간 여행이었다.
함께한 친구들은 마커스, 로브로, 라픽, 레아, 셀린 그리고 나로 여섯 명이었다. 폰시는 여러 변명을 늘어놓으며 참여하지 않았다.
얼떨결에 따라온 토리노에서 우리는 한없이 걸어 다녔다. 지역의 유명한 성당과 성, 거리, 박물관들을 둘러보다 지쳐 공원 풀밭에 드러누워 웃고 떠들었다. 로브로와는 서로 장난치며 더 편해지고 가까워질 수 있었고 이날 여행에서 그의 유창한 이탈리아어 솜씨를 들으며 한번 더 그에게 반했다. 여행을 통해 처음 제대로 마주한 레아와 셀린과도 가까워질 수 있었고 친구의 범위가 넓어진 것 같아 즐거웠다. 잔잔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평소 성격에 3명 이상과의 여행을 가본 적이 거의 없었지만 이번 여행은 모두들 밝지만 차분한 성향이어서 잘 맞았던 것 같았다.
라픽, 레아, 셀린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고 웃음이 많고 한없이 착한 마음씨를 가진 학생들이었다.
토리노에서 특별하게 기억 남는 장소는 공원과 젤라토 가게였다.
밀라노에서는 공원에서 누워 있을 수는 있지만 저렴한 대마초 냄새가 진동해 제대로 쉬는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토리노는 깨끗했고 ‘shady’한 지역은 보이지 않았다. (당일 여행으로 가서 그럴지도 모른다.)
젤라토 가게는 친구들 중 한 명이 찾은 곳이었는데, 토리노에서 가장 유명한 젤라토 가게인지 한적한 거리에 위치해 있었지만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정확히 어떤 맛을 먹었는지 사실 기억나지는 않지만 먹어본 아이스크림, 젤라토 중 가장 부드럽고 향긋하고 고급스러운 맛이었다.
그렇게 또 한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다들 지쳐있지만, 돌아가는 버스 시간까지 두 시간 정도의 여유시간이 남아있었다. 버스정류장 인근의 한 카페테리아 앞에 앉아 떠들고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때웠다. 하루 종일 붙어 다니며 이야기했는데도 어떻게 이야기의 주제가 닳지 않을 수 있었는지.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는 우리 모두 녹초가 되어 곯아떨어졌다.
유럽의 경우 멀리 이동하는 버스일 경우 대개 화장실이 함께 있었는데, 중간중간 화장실을 갈 때 로브로는 나를 찌르거나 눈웃음을 지으며 장난을 걸어왔다. 고등학생, 중학생 때도 해보지 못한 귀여운 티격태격을 했다.
도시로 돌아온 후 마커스의 주도로 우리는 각자 짐을 내려놓고 간단히 술을 함께 마시기로 했다.
‘지호, 너도 갈 거야?’
‘응! 너는?’
‘나는.. 글쎄.. 짐 놓고 고민해보려고.’
‘에이. 그러지 말고 잠깐만 와서 같이 놀자, 응? 나도 피곤해서 잠깐만 있다가 갈 건데!’
‘하하. 일단은 가서 볼게.’
넘어오지 않을 것 같은 로브로의 태도에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사실 그 없이도 충분히 재미있을 조합이었다. 폰시까지 합류한다고 하니!
그날 늦은 저녁, 우리는 나빌리 근처에서 다시 모였다. 폰시와 마커스와 먼저 만나 대화를 나누던 중 저 멀리서 라픽이 보였다. 그리고 라픽 옆에는 로브로가 있었다.
이 날 밤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클럽을 간 것도 아니었고 그냥 간단히 술을 마시고 케밥을 먹었던 것 같다.
피곤하면 추위를 더 잘 타는 나는 무리 사이에서 맹한 표정으로 덜덜 떨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로브로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로브로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마주했고 두 손으로 살포시 후드를 씌워주었다.
‘감기 걸릴라.’
콩콩콩콩.
꿈에만 그리던 오빠가 생긴 기분이었다. 다만 친오빠가 아닌, 남자로서의… 폰시는 그 뒤에서 죽일 듯이 로브로를 노려보았고 중간에 만나 함께 놀게 된 다른 여자 아이들의 시선도 느껴졌다. 그때 깨달았다. 아, 로브로는 내 눈에만 멋있고 잘생긴 남자가 아니구나. 당연히 남들에게도 인기 있을 사람이었다. 흠칫했다.
기본적으로 이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고 되려 그런 이성은 피하거나 친구로 지내는 걸 선호하는데, 인기가 많으면 구설수에 오르기 십상이고, 주변 사람들의 질투도 엄청나서 그런 사람들 옆에 있으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늘 작은 무리로 놀고, 또 로브로라는 사람 자체에, 그리고 둘 사이의 기류에만 집중해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반면 로브로는 주변은 전혀 인식하지 않았고, (폰시를 경계하는 건 느껴졌다.) 계속 내 옆에 붙어있으며 칠칠맞은 나를 챙겨주었다. 섣부른 스킨십을 시도하지 않고 묵묵하게 옆에 있는 로브로의 모습에 한번 더 반했던 것 같다.
성급하게 관계를 확정 짓지 않고 서로 어렴풋이 호감을 표현하며 무리 사이에서 붙어 지냈고, 짧은 시간 후 귀국해야 하는 교환학생 상황 상 이런 관계성이 부담 없고 즐거웠다.
풋풋하고 간질간질한 감정, 예쁨 받는 순간들에 젖어 시간을 보냈다. 애정 하는 친구들 그리고 로브로까지 함께하니, 아시아인,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떼어내고 있는 그대로 지호로 존재하고 있었다.
며칠 후, 마커스의 생일이었다.
그날 밤, 우리 집에서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고, 10명에서 15명가량 되는 친구들이 오기로 했다. 마커스에게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던 나는 폰시를 꼬드겨 생일 케이크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마커스는 연이은 강의로 하루 종일 외출해있는 날이어서 딱이었다.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에 레시피를 찾고 사야 할 재료들을 리스트업 해 놓았다. 강의실에서도 집중하지 못하고 온종일 케이크 만들 생각, 마커스가 좋아할 모습을 상상하며 시간을 때웠다. 처음 폰시에게 케이크와 파티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자, 그는 이 상상들을 행동으로 옮길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하하 지호 넌 정말 믿을 수 없어. (Jiho, you’re unbelievable.)’
우쭈쭈 하며 장단을 맞춰줄 뿐이었다.
스페츌러, 케이크 틀, 휘핑기 등 생각보다 필요한 도구들이 많았다. 이 모든 것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행히도 폰시 이모께서 필요한 것들 다 가져다 사용해도 된다고 하셨고, 폰시의 도움으로 불필요한 지출을 막을 수 있었다.
밀라노를 오기 전부터 베이킹과 요리를 즐겨했었기 때문에 케이크 만드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파티에 올 많은 인원을 고려해 대형으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재료 양을 어림잡아했고 레시피와 다른 스케일로 만들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제멋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매뉴얼이나 정해진 방식을 대충 읽고 감으로 만들어가는 성격이어서 케이크를 만드는 시간도 온종일 걸렸다.
낮 한시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오븐에서 빵을 꺼낼 때쯤 해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재료들을 섞고 이것저것 만들 동안 폰시는 그릇들과 여기저기 흘리거나 튄 재료들을 닦아주었다.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떠들며 만들다 보니 순식간에 저녁시간이 되었다.
오래된 오븐과 익숙하지 않은 크기 때문에 시트 한 부분이 타버렸지만 옳다구나 하며 그 부분을 잘라내 안주 삼고 남은 부분을 사용했다. 탄 부분들을 잘라내니 시트의 1/4이 날아가버렸지만 그래도 크기는 상당했다.
완성한 케이크는 내 얼굴의 세배는 되어 보였다. 시트를 반으로 갈라 그 사이에 휘핑크림과 바나나를 얹고, 그 위를 마스카포네 휘핑크림으로 덮은 후 블루베리로 장식했다.
파티까지 시간이 남아 케이크를 거실 냉장고 (집에 냉장고가 두 개 있었다.)에 넣어두고 보울에 남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닦아 먹으며 위스키로 몸과 마음을 데웠다.
사온 위스키는 700ml짜리 발렌타인이었는데, 평소라면 항상 마시던 1유로 와인을 마셨겠지만 마커스 생일을 핑계 삼아 위스키를 골랐다. 그렇다고 위스키가 (한국에 비해) 비싼 건 아니었다.
폰시는 맥주와 와인을 택해 홀로 위스키를 마셨는데 떠들며 마시다 보니 마커스가 도착할 때쯤 이미 1/3 가량을 비워버렸다.
이른 저녁, 마커스가 합류했다. 친구들이 오기 전, 소소하게 담배와 술과 대화를 즐겼다. 케이크는 비밀이었다.
여덟 시 반, 아홉 시가 되자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종 술과 과자들을 들고 왔고 친구들로 순식간에 거실이 빽빽해졌다. 다행히도 사람들이 불편할 정도로 거실이 좁지 않아 나름 제각기 자리 잡고 앉을 수 있었다. 문제는 내 방문이 거실에 위치해 있어 사람들이 틈만 나면 열어보려 해서 문을 잠가놓아야 했다. 워낙 개인 공간과 사생활을 중요하게 여겨 폰시 심지어는 마커스에게도 방을 보여주지 않을 정도로 프라이빗한 성격이다 보니 이러한 집 구조가 처음으로 불편하게 여겨졌다.
토리노 여행을 함께했던 레아, 셀린, 라픽과 로브로, 이태리어 수업을 함께 들으며 조금 가까워진 일본인 여자아이 Saya, 초반에 인사를 나웠던 블라드, 그의 폴란드인 여자 사람 친구 마리아, 마커스가 새롭게 호감을 가지게 된 또 다른 폴란드 여학생 아니에스카 (마커스는 쉽게 사랑에 빠지고는 했다.), 그 외에도 오며가며 스쳐 지나간 얼굴들이 몇 보였다.
폰시와 눈빛을 주고받고는 마커스가 돌아선 틈을 타 케이크를 꺼냈다.
‘Happy birthday to you.’
제각기 이야기를 나누다 하나 되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케이크를 본 마커스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지호가 하루 종일 만든 케이크이야!’
폰시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해주었고 마커스는 고마움의 표시로 꼭 안아주었다.
‘하하 같이 만들었어. 조금 어설퍼 보일 수는 있지만 정말 맛은 있어!’
작게 작게 조각낸 케이크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위스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들뜬 나를 걱정한 폰시와 마커스가 번갈아가며
‘지호! 물 마셔!’
‘지호! 물 마시고 있어?’
라며 상태를 확인했고 그때마다 나는 위스키를 물처럼 병째로 들이켰다.
‘폰시 야 이거 봐! 마시고 있다? 물? 어 아니. 응 그래 물! 어, 뭐지. 물!’
마커스가 진지한 얼굴로 물이 꽉 찬 컵을 내밀었다.
‘빨리 마셔.’
시무룩해져 소파에 앉아 물을 홀짝이고 있자 로브로가 팔걸이에 걸터앉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많이 마셨어?’
‘글쎄. 지금은 물을 마셔야 하는 걸.’
로브로의 큰 손에 내 머리가 쏙 들어갈 것 같았다. 그의 손길이 기분 좋아 장난스럽게 씩 웃어 보였다.
로브로가 웃었다. 어린 소녀가 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왠지 로브로에게는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한껏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다들 취기에 젖어들 때쯤 술이 모두 떨어졌다. 들고 있던 위스키 병도 바닥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겨 근처 바에서 2차를 즐기기로 했다. 주섬주섬 옷과 짐을 챙겨 나갈 때 한 여자아이가 다가왔다.
‘근데, 로브로.. 여자 친구 고향에 있다던데…’
찬물을 확 끼얹었다. 멀리 있던 로브로와 눈이 마주쳤고 그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취기까지 합쳐져 마음이 더더욱 심란해졌다.
바는 집으로부터 10분가량 거리에 있었다. 마커스와 폰시 사이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걸어갔다. 자리가 세팅되는 동안 바 앞에서 잠시 대기해야 했다. 취기가 돌아 구석에 서 있을 때 로브로가 다가왔다. 심란한 마음에 그의 눈을 피하려 하자 로브로가 무슨 일 있냐며 걱정했다.
‘있잖아 로브로, 아. 아니야.’
‘왜, 무슨 일이야. 얘기해줘 편하게.’
‘음. 그게. …’
‘응~ 괜찮아 말해봐.’
‘너 여자 친구 있어?’
‘응? 여자 친구??’
‘응 아까 들었어. 어떤 애가 와서 네가 크로아티아에 여자 친구가 있다고 그랬어!’
‘에? 무슨 소리야. 아니야 없어. 하하 그게 걱정이었어?’
없다는 말에 활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없어??’
‘응! 하하하’
‘그래?’
‘그렇다니까.’
‘그럼 됐어. 헤헤헤’
다행이라는 마음과 동시에 민망함이 몰려와 후다닥 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폰시 옆에 앉자 뒤따라 들어온 로브로가 내 옆에 앉았다.
그 이후로 바에서 오래 머무르지는 않았다. 상당히 취하기도 했고 온종일 케이크 만드느라 무척이나 피곤했다. 눈치챈 듯로브로가 나갈 채비를 했다.
‘집에 갈래? 나는 먼저 가려고. 위험하니까 내가 데려다줄게.’
로브로는 자전거를 끌고 와서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은 상태였다.
‘으응. 갈래 너무 졸려..’
자리에서 일어나자 폰시가 팔을 잡았다.
‘지호 어디가.’
‘집 갈래. 너무 졸려.로브로가 데려다준데.’
‘로브로? 너… 조심해 알겠지? 이따가 잘 들어갔나 확인할 거야.’
그렇게 로브로와 함께 웃으며 안전하게 귀가했고 로브로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누웠다.
잠든지도 모르고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기억이 흐릿했다. 숙취는 심하지 않았지만 몸이 너무 무거웠다.
‘으… 쩝. 으악!’
입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거울 집어 들고 입안을 확인했다. 다행히도 상처는 없었다. 아프다거나 따끔한 곳도 없었다. 그러면 뭐지..? 어디서 나온 피지? 도로 침대에 누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문득. 한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힘들게 계단을 올라 집에 도착했고, 로브로에게 ‘짠’이라 외치며 방에 들어섰다. 헤벌레 웃는 나를 눕혀주고 돌아섰다.
‘로브로!’
로브로가 돌아와 몸을 숙여 굿 나이트 키스를 했다. 정확히 입술에 하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몸을 기울이자 목을 끌어당기며 그의 입술을 내 입술로 가져왔고.. 끔찍하지만, 술김에 그의 입술을 앙! 하고 깨물어 버렸다.
얼마나 세게 깨문 건지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냥 그랬다는 사실, 그 행동만 기억나고 심지어 그 이후에 그가 어떤 반응을 하고 나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민망함에 자체적으로 내 뇌가 기억을 삭제시킨 것 같다. (다행히도) 유추해보면 피가 많이 보이진 않았으니 엄청나게 세거나 길게 문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로브로와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있던 중 꼭두새벽에 방문이 열렸고 비몽사몽 눈을 뜨니 폰시가 고개를 삐죽 내밀고 있었다.
‘으흐음…’
‘잘 자 지호.’
행여나 로브로가 못된 짓을 한건 아닌가 걱정되어 잘 들어왔는지 확인하려 했다고 한다.
‘못된 짓? 하하…. 못된 짓은 내가 했지.’
폰시에게 생각나는 한의 모든 일들을 이야기해주며 이미 벌어진 일을 조금이라도 떨쳐내려 했다. 로브로의 입술을 깨물었다고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 눈을 꼭 감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기도 했는데, 폰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냥 즐거워했다. 오히려 로브로가 술에 취한 나에게 키스하려 한 것이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밀라노에서의 두 번째 키스까지 망친 나는 더 이상의 로맨스는 꿈꾸지 않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로브로와의 연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