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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gela Feb 11. 2022

Via Negroli 2, Milano

고백

마커스 생일 다음날, 촬영이 있었다. 폴란드 친구 아니에스카의 (마커스가 좋아한 친구가 아닌 다른 친구였다. 폴란드에서 아니에스카라는 흔한 이름이었나 보다.) 부탁으로 그녀의 모델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본국에서 패션 포토 실장님 아래서 공부한 그녀는 밀라노에 와 패션위크 촬영과 다양한 친구들을 섭외해 촬영하며 포트폴리오를 쌓고 있었다.


콘셉트는 시크였다. 아니에스카와 그녀의 친구 한 명이 동행했고 둘은 자라에서 의상을 준비해왔다. 하이패션 화보 촬영처럼 최대한 ‘시크’한 표정, 자아도취된 표정을 부탁했는데, 장소를 따로 대여한 것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민망함에 쭈뼛쭈뼛거렸지만 계속되는 그녀의 감탄사와 칭찬에 금방 긴장이 풀어지고 우쭐해졌다. 지나가는 행인들이 멈춰 지켜본다던가 핸드폰을 꺼내 찍어가기도 했다.


촬영을 하며 정신을 돌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로브로 생각에 속이 답답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잠깐의 휴식시간에 문자를 보냈다.


‘어제 정말 고마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아니야. 잘 잤어?’


몇 분 후 답변이 왔다. 울적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희망에 차오르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너는?’


‘나도. 나는 어제 별로 안 마셨거든. 뭐해?’


‘촬영 중이야.’


‘촬영?’


평범한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로브로, 이따 저녁에 뭐해?’


‘음.. 아무런 계획 없어.’


‘그러면 잠깐 만날래?’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무심한척하며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래. 밤에 이태리어 강의 있으니까 그전에 잠시 뭐 먹자.’


‘그래. 이따 봐!’


다행인 동시에 당황스러웠다.


어쩌지? 입술 깨문 일을 사과해야 할지, 끝까지 시치미 떼며 모른 체할지 마음이 서지 않았다. 으아! 몰라. 얼굴 보면 무슨 말이라도 나오겠지. 어쩌다 로브로에게 이토록 목메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짝사랑하는 소녀처럼 마음이 설레는 동시에 복잡해졌다.


기분 좋게 촬영을 마무리하고 잔뜩 긴장한 채로 로브로를 만나러 갔다.

로브로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전처럼 친근하거나 살가운 느낌은 없었다. 캠퍼스 앞 포카치아 매장 앞에 마주 보고 앉았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숨 막히는 분위기였다. 어쩌지.. 두뇌회전이 멈춰버렸다.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형식상의 겉도는 대화만 주고받았다. 로브로는 변해있었다. 실망했겠지.


‘이제 수업 가야 할 것 같아.’


로브로가 먼저 일어났다.


‘응. 그래… 저기, 로브로!’

‘응?’

‘아. 아니야.’

‘그래. Ciao Ji.’


마음 한 조각이 부러진 기분이었다. 무기력해졌다.

이 모든 일이 내 부주의로 인함이라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이날 밤, 수업을 마치고 마커스, 폰시와 함께 두오모에서 맥주를 마셨다. 촬영 때문에 하루 종일 힐을 신고 다녔던 나는 참지 못하고 신발을 벗어던지고 양말 바람으로 광장을 걸어 다녔다. 혼란스러웠던 마음이 점차 진정되었다.

우리는 별다른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한 밤이었다.

그렇게 양말 바람으로 트램에 올라타 집까지 귀가했다.



그 주 주말, 밀라노에 겨울이 다가왔다. 이탈리아 (밀라노 특히)의 가을 겨울은 비가 많이 와 우중충하고 묘하게 기분 나쁜 추위가 뼈를 시리게 한다. 조울증 마냥 희비를 오가던 마음도 날씨를 따라 울적해졌다. 어떻게라도 이 기분을 털어내고 싶어 라픽과 운동을 하기로 했다.


라픽은 두오모 광장에 위치한 무척이나 팬시한 헬스장을 다니고 있었다. 그 헬스장은 회원이 데려온 지인에게 1회 시설 무료 이용권을 제공해주었는데, 덕분에 마음 놓고 입장할 수 있었다.


헬스장은 몸 좋은 milanese (밀라노인들, new Yorker 같은 표현이다.)로 가득했다. 그 사이에 선 나는 삐쩍 마른 나뭇가지 같았다.


사람 구경도 잠시, 정말 오랜만에 온 헬스장이라는 사실에 들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기구들을 구경했다.

‘구경’만 했다. 겁이 많아 운동하다 다치거나 기구를 고장 낼까 불안해 손잡이만 만지작 거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기구들을 한 번씩 만져보고 돌아오니 라픽은 유산소 운동을 마치고 웨이트를 하고 있었다. 이리저리 맴돌다 가장 친숙하고 쉬운 러닝머신에 올라탔다. 걷다 뛰다 걷다 뛰며 나름 인터벌 운동을 하다 땀이 송골송골 아침 이슬처럼 이마에 맺힐 때쯤 내려와 라픽에게 갔다.


‘벌써 운동 다한 거야?’


순간 이상한 자존심이 섰다.


‘아니야! 더 할 거야. 더 해야지.’


사실 헬스장 운동에 큰 흥미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너무나 팬시해 내가 불청객처럼 느껴졌다.


우물쭈물하고 있자 라픽이 기구를 내려놓고 맨몸 운동을 알려줬다.


스쾃, 레그 라이즈 등 원래 알고 있던 운동이었지만 같이 하니 재미있었다. 운동만 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며 해서 그런지 위안이 되는 시간이었다.


라픽은 로브로의 룸메이트였다. 그래서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로브로에 대한 이야기도 잘해주었다. 아니 사실, 무엇보다 자존심을 버리고 상황을 직면하도록 도와주었다.


두 시간가량의 운동을 마치고 나와 근처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운동 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추적추적한 거리를 보며 따듯한 차를 마시는 기분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울적한 기분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뭐가 그렇게 걱정이야. 좋으면 좋은 거지. 혼자 전전긍긍하는 것보다 연락해서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겠어?’


맞는 말이었다. 결국 혼자 상상하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는 꼴이었다.


‘그렇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걸.’


‘그냥 솔직하게. 나는 네가 좋은데,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헷갈린다. 그렇게 이야기해봐.’


라픽의 말을 곧이곧대로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감정 표현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가득 용기를 불어넣어 준 라픽 덕분에 고백의 문자를 보낼 수 있었다. 답장이 오지도 않았는데 말을 내뱉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잘되면 좋은 거고, 안되면 연이 아니었던 거야 지호. 그러니 결과에 대해 너무 걱정하지 마.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렇게 라픽과 작별하고 귀가했다. 어느덧 저녁이었다.


침대에 누워 노곤 노곤한 상태로 핸드폰을 쳐다보고 있을 때, 진동이 울렸다.

로브로였다. 문자 내용이 상당히 길어 보였다. 미리보기로는 읽을 수 없는 길이였다.


읽고 싶지 않았다. 이미 감이 왔기 때문에, 거부당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고 자연스레 눈은 그 글을 읽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속상했다. 왜 속상한지, 왜 눈물이 나는 건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났다.

그렇게 한참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나는 그냥 우리가 친한 친구로 지냈으면 해.’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앞으로 로브로를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았고 아니, 로브로를 생각해서 눈물이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거절당하고 어렵게 한 고백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할 뿐이었다.

몇 시간이 지나니 몇 날 며칠 긴장하며 희비를 오가던 상황들이 이미 너무 오래된 과거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기분이 상하기는 했지만 라픽 말대로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제대로 마주하고 나니 지난 한 주가 우스워졌다. 그리고 솔직한 감정 표현에 대한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다. 라픽 덕분에 다시 ‘나’를 중심으로 상황을 대처할 수 있었다.


전부터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지면 모든 것을 내어주려 노력하다 혼자 상처받고 마는 습관이 있었다. 그 상처는 결국 상대가 아닌 내가 만들어낸 기대감에 실망하며 스스로 만든 상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잃고 쉽게 상대와 그 감정들에 휩쓸리고는 했다.

하지만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나’를 잃지 않는 법을 배워나갈 수 있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민망한 키스와 실패한 로맨스 이야기였지만 교훈이 되었던, 이제는 술안주가 되어버린 귀엽고 순수한 과거가 된 나의 유럽 로맨스 로망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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