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커스와 라면, 로맨틱한 디너와 최악의 키스
며칠 후 교환학생 프로그램 중 ‘All you can drink’, 16 유로면 무엇이든 먹고 마실 수 있는 행사가 올라왔다. 놓칠 수 없는 행사라 생각했지만 남자인 친구들에서 벗어나 girls’ night을 즐기고 싶어 지난날 아페리티보에서 만난 한 친구에게 연락했다. 이 친구는 밝고 해맑은 성격으로 동글동글한 외형과 이목구비를 소유했고, 그에 어울리는 푸들 같은 파마머리를 한 동유럽에서 온 학생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여자인 친구가 없던 터라 친구와 둘이 시간을 보내기로 하고, Traveling Bar를 떠올리며 교환학생 프로그램으로 올라왔으니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참석했다.
밀라노에서 한 달 넘는 시간을 보내며 가보지 않은 신도시 같은 장소의 한 클럽이었다. 2층에 위치한 이곳은 여느 클럽과 같이 어두웠지만 지난번 갔던 알카트라스와는 달리 보다 세련되고 모던한 분위기였다. 클럽보다는 라운지 바에 가까웠다. 막상 들어서니 교환학생은 우리가 유일해 보였다.
꽉 차 있지도 않았고 몇몇 무리들이 모여 행사를 즐기고 있었다.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지만 해맑은 친구를 보며 분위기라도 띄울 겸 빠르게 와인을 받아왔다. 그 사이 친구는 케이터링 된 음식들을 작은 접시 한가득 담아왔다.
대화를 나누는 시간과 각자 술과 음식을 리필하러 다녀오는 시간이 동일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와인을 마시다 칵테일로 주종을 바꿨고 자주 들락날락거리다 보니 친구보다 바텐더와 친숙해졌다. 바텐더는 자주 바로 향하는 나를 보며 웃었고 주문을 하기도 전에 ‘진토닉? 세게?’라고 선수 쳤다.
‘What’s your name?’
이태리 억양이 섞인 어눌한 영어로 소리치며 대화를 시작한 바텐더는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물어보았고 밀라노 현지인이라는 메리트에 흔쾌히 아이디를 넘겨주고 자리로 돌아왔다. 이후로 한두 잔 더 들이켠 후 가득 찬 배와 조금 취한 친구를 데리고 나왔다. 마침 근처에 있던 마커스와 마커스의 친구들을 만나 조금 더 밤을 즐기다 귀가했다.
다음날 바텐더에게 연락이 왔고 그는 스몰토크를 건너뛰고 데이트 신청을 했다. 자신이 아는 두오모 근처 바에 함께 가자고 했고 그가 쉬는 날에 맞춰 약속을 잡았다. 와인을 좋아하는 것 외에는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타인과의 만남이라니. 여대학생에 밤문화를 즐길줄 몰랐던 당시의 어렸던 나에게는 흔치 않은 경험의 기회였고 이는 긴장되는 동시에 새로움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으로 가득 차게 했다.
밀라노에서의 낮은 강의 한두 시간과 도시를 돌아다니는 동시에 친구들과 함께하는 밤의 기다림이었다.
‘All you can drink’ 바로 다음 날에도 대학교 교환학생을 자축하는 파티 행사가 있었고 마커스와 마커스 법대 친구 Rafik (라피크), 지난번 만났던 루이자 행사에 참여했다. 폰시는 옥토버페스트 이후로 이러한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매번 돈이 없다며 빠졌다. (마커스와 나는 이런 폰시를 놀리고는 했는데, 폰시가 돈이 부족할 때는 우리가 술과 음식을 샀고 돈이 있을 때는 항상 몰아서 우리에게 베풀고는 했다.)
이날도 피자파티 때와 비슷하게 60명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학생들이 모여 웃고 떠들었고 일찍 귀가한 몇 명 외에 모두 함께 클럽으로 향했다. 잔뜩 들뜬 채 트램에 올라타 왁자지껄 떠들다 ‘Alcatraz’ 바로 옆에 위치한 또 다른 클럽에 들어섰다.
이곳은 사람들이 많았고 대부분 이탈리아인들이었다. 이태리인을 알아보는 데는 생김새 외에도 옷으로 구분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 흰 셔츠에 슬랙스를 빼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빽빽하게 차 있는 공간 안에 비비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려니 순식간에 진이 빠졌고 답답했다. 마커스 외 몇몇과 잠시 나와 흡연구역에서 한숨 돌리며 술을 마셨고 마커스는 흥에 취해 ‘dope’한, 간지 나는 사진을 같이 찍자며 친구에게 핸드폰을 맡겼다. 술에 취한 채 ‘힙’한 포즈를 취한 사진을 남기고 함께 귀가했다.
돌아가는 길에 마커스는 라면이 먹고 싶다고 했다. 취한 상황에서 라면이 당긴다니, 한국 사람 다 됐는 걸? 속으로 내심 뿌듯해하며 흔쾌히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집으로부터 얼마 남지 않는 거리에서 걸어가며 마커스와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고 마커스는 내 허리에 팔을 감았고 나는 마커스에게 기대며 집으로 들어갔다. 묘한 기류가 흘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계속 웃었고, 별 의미 있는 대화가 오고 가지는 않았다.
“오늘 진짜 재밌었다.”
“맞아 재밌었어 하하.”
그 사이 라면이 완성되었다.
“어때?”
“오! 너무 맛있어.”
마커스가 라면 먹는 것을 지켜봤다. 갑자기 적막이 흘렀다.
“으하암. 나는 피곤해서. 먼저 자야겠다.”
“어 그래. 라면 고마워 지호.”
거짓 하품을 하며 후다닥 방 안으로 들어왔다. 후.
두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다행이야. 늦은 새벽 탓이야. 하마터면. 으!
부르르 떨며 자칫 벌어졌을 수 있던 상황을 떨쳐내고는 잠에 들었다.
그날 이후 아무렇지 않게 마커스와 인사를 나눴지만 둘은 한동안 이 날 밤에 대해 금기된 주제라도 되는 듯 언급하지 않았다.
며칠 후 바텐더와 만나는 날이었다. 그가 예약한 바는 무척이나 펜 시한 곳이었다. 이태리 명품 브랜드 돌체 앤 가바나에서 운영하는 bar로 (Martini • bar & bistrot | D&G) 부촌 한가운데 위치한 이곳은 건물 중간 뚫린 공간에 의자와 테이블들이 세팅되어 있었고 상쾌한 밤공기와 별자리로 가득한 하늘을 안주 삼아 와인을 즐길 수 있는 고급스러운 장소였다.
이러한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20대 초반 학생이었던 나는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목이 아플 때까지 사방을 둘러보며 감탄을 자아냈고 바텐더는 웃으며 자리로 안내했다.
의자를 빼주며 내가 앉을 때까지 그 뒤에서 기다렸고 이후 웨이터가 빼준 자리에 착석했다.
계속 바텐더라 칭하는 이유는 사실,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바텐더에게 메뉴와 와인 선정을 맡겼고, 서빙이 되는 대로 간단한 음식들과 와인을 즐겼다. 아란치니, 파스타 등 다양한 이태리 음식들이 나왔고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 배경을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본래 이태리 출신은 아니지만 당시 밤에는 바텐더로, 낮에는 레스토랑에서 서브 셰프로 일하고 있었고 음식과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큰 키에 잘 다듬어진 수염, 짙은 이목구비에 굵은 목과 다부진 몸을 가진 그는 처음 접하는 마초적인 외형적 매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부드럽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어느 정도 서로를 알아가다 보니 금세 와인 한 병이 동이 나 있었고 우리는 자리를 옮기기로 했다.
쭈뼛쭈뼛하는 사이 이미 바텐더가 계산을 한 후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연신 ‘Grazie mille.’를 반복하며 그를 쫄래쫄래 따라 나왔고, 우리는 두오모 근처의 캐주얼한 분위기의 바에 들어섰다. 바텐더를 따라 밀라노의 유명한 술 ‘Aperlo Spritz’를 한 잔씩 주문했고 우리를 테라스에 앉아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대화가 지루해졌고 피곤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접점이 없어서인지, 생각보다 그의 매력이 빠르게 소진된 탓인지는 몰라도 더 이상 그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에 모여있는 폰시, 마커스와 떠들며 저렴한 1유로 화이트 와인이나 한잔하고 자고 싶었다. 하지만 비싼 저녁을 사준 그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어색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때마침 친구들에게 문자가 왔고 바텐더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친구들이 나를 찾아서 급하게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일어섰다. 그는 트램 정류장까지 함께했다.
다시 한번 ‘grazie mille di tutto’라 이야기하고 가벼운 포옹과 볼 키스를 하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바텐더가 팔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 그를 볼 새도 없이 순식간에 몸이 바텐더의 품에 안겨있었고, 그의 얼굴이 내 얼굴을 덮치며 입술 안에 그의 혀가 들어와 있었다. 두오모 광장 뒤편, 공공장소에서 낯선 마초남과의 프렌치 키스는…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현재(2021년)까지도 여태껏 해본 키스 중에 최악이었다. 로맨스란 감정이 없었을뿐더러 그나마 남아 있던 호감까지도 사라지게 만든 원인은 그의 까끌한 수염도 갑자기 키스하는 문화적 차이도 아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입냄새였다. 와인에 각종 음식과 안주에 마지막으로 마무리한 단 음료. 그리고 틈틈이 그가 핀 담배 냄새까지 합쳐져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어도 저녁 동안 그의 입에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남자 친구와의 키스 외에는 해본 적이 없던 이 새로운 경험에 심장이 갈비뼈를 부러뜨릴 것처럼 쿵쾅거렸고 나는 혹여나 그가 그 소리를 들을까 황급히 몸을 떼어내며 지을 수 있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좋았어. 또 봐.’
바텐더의 말에 하하 웃고 고개를 끄덕이며 ‘ciao’를 외쳤고 황급하게 트램에 올라탔다. 손이 떨렸다. 아니 온몸이 떨렸다. 취기는 전혀 없었지만, 속이 울렁거렸다. 빨리 입을 헹궈내고 싶었다. 입에 있는 침을 삼키고 싶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27번 트램에서 아주 조금 정신을 차리고는 폰시에게 전화했다.
‘Jello?’ (폰시는 헬로에 항상 j발음을 첨가했다.)
폰시의 포근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물이 쏟아졌다.
‘무슨 일이야? 지호 무슨 일 있어?’
꺽, 꺽. 긴장이 풀려 멈추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막으려 하며 대답했다.
‘나.. 훌쩍. 지금. 훌쩍. 키스했어.’
‘뭐라고? 근데 왜 울어?’
‘It was so bad. The kiss. (최악이었어. 키스가.)’
전화기 너머로 깔깔 웃는 폰시의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내가 낑낑거리며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는 웃음 참으며 폰시가 대답했다.
‘어디야 지금.’
‘27번 트램.’
‘알겠어. 나 집에 마커스랑 있어. 빨리 와서 다 알려줘.’
웃음 참는 폰시의 목소리를 들으니 왠지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았고 눈물도 조금 멎었다.
거실과 소파, 따뜻한 공기, 그 안에 널브러진 폰시와 마커스를 상상하며 집으로 향했다.
오래된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어 계단 두 칸 세 칸을 뛰어넘으며 집에 들어섰고 부리나케 마커스와 폰시를 찾았다.
둘은 나를 보자마자 박장대소를 터뜨렸고 그 모습을 보고는 다시 엉엉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여태껏 있던 일들을 하나하나 이야기하며 집에 귀가하기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마커스는 뭐가 대수냐며 덕분에 특별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남자는 경험할 수 없는 펜시한 바에서의 무료 식사라. 나름 값어치 한 키스라며..
폰시를 계속해서 웃을 뿐이었다.
친구들의 시원찮은 대답에 울분이 터져 화장실로 달려가 침과 없는 가래까지 만들어 입안의 모든 액체를 뱉어내고 과격하게 이를 닦기 시작했다.
띠링-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뒷주머니에 꽂아둔 핸드폰에서 또 한 번 알람이 울렸다. 엉덩이부터 시작해 온몸이 오싹해졌다.
제발 제발 제발 아니길.
‘오늘 너무 좋았어. 혹시 주말에 뭐해?’
바텐더로부터 DM이 와있었다.
핸드폰 쥔 손을 뻗어 최대한 몸으로부터 떨어뜨리고는 치약거품을 입안 한가득 머금은 채로 거실로 달려 나가 친구들에게 투정을 부렸다.
‘어떡하지. 흐아앙.’
‘뭐야. 차단하면 되지!’
‘그래도 되는 거야..? 하지만 비싼 저녁을 얻어먹었는걸..’
‘아 지호, 지호.. 바보야 그렇다고 네가 만나야 하는 건 아니야. 차단해버려. 번호는 모르지?’
마커스의 말을 따라 미안해하며 바텐더를 차단했다.
그렇게 바텐더는 최악의 프렌치 키스남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고, 비포 시리즈(영화)로 키워온 유럽에서의 로맨스에 대한 환상에 큰 금이 갔다.
몇 년이 지나 폰시와 그날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이제는 그날의 어리석고 어렸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박장대소를 터뜨린다.
‘그래도 나는 너희들이 할 수 없는 경험 두 가지를 했어.’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