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과의 만남, 또다시 간 독일. 밀라노에서의 독일 저녁
폰시와는 초반처럼 자주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커스와도 친했기 때문에 집에 자주 왔고, 해서 서로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처음에는 불편하다기보다는 어쩔 줄 모르겠는 어색함이 컸다. 하지만 함께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며 몇 분 지나니 다시 깔깔 거리며 웃고 있었다.
뮌헨을 다녀온 지 삼일 정도 지나 부모님을 뵈러 또 한 번 독일로 향했다.
아버지가 참석하시는 학회가 브레멘에서 열려 겸사겸사 어머니도 따라오시며 한 달 만에 (언니를 제외한) 가족 상봉을 하게 된 것이다.
브레멘은 음악으로 유명한 도시인데 도시보다는 작은 마을, 분당보다 작은 정도의 정겨운 동네 같았다.
부모님과 함께 한 덕에 몸도 마음도 편안한 시간이었다. 머물게 된 숙소는 옛 집을 개조해 호텔로 만든 공간 같았는데, 넓고 정겨웠다.
아버지가 학회를 다녀오실 동안 어머니와 동네를 돌아다녔고, 저녁은 호텔 인근의 유일한 식당에서 해결했다. 의외로 이 식당 음식이 가장 맛있었는데, 그리스 음식점이었다.
일정을 모두 마치고 아무것도 없는 날, 함부르크를 방문했다. 브레멘에서 기차를 타고 30분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함부르크는 상당히 큰 도시로 예 건물들과 운하가 흐르는 도시로 밀라노와는 다른 풍경이었다. 파리와 밀라노보다 건물들이 높은 느낌이 들었다.
가족은 투어버스를 타며 한 바퀴를 돌았고 전반적인 도시를 구경할 수 있었지만 각자 하고 싶은 건 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지루한 일정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독일의 사창가였다.
밤 문화가 발달되어있는 독일의 낮에 방문한 성매매 거리는 한적했지만 간판들만 보아도 꽤나 화려해 밤에는 얼마나 더 휘황찬란할지 궁금했다.
모르고 들어섰다면 예쁘고 흥미로운 간판들이라며 한없이 구경했을 정도였다.
함부르크의 부촌은 흔히 생각하는 도시, 서울이나 뉴욕의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널찍한 마당과 나무들이 있었고, 강가를 두고 주택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사람 냄새나는, 한적한 동네의 모습에 가까웠다.
브레멘과 함부르크 여행은 별 탈 없이 마무리되었다. 며칠 전 독일에서의 악몽 같은 기억들과는 상반되는 잔잔하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한 달 만에 재회해 반가운 부모님이었지만, 한국에서도 자취를 했었기 때문에 혼자의 시간이 편했던 터라 작별이 슬프지는 않았다.
어서 밀라노에 깃들여지고 싶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거의 매일 밤이 폰시와 마커스와의 시간이었다.
아직은 어색했지만 여행을 다녀와 떨어진 시간이 조금 있다 보니 불편했던 ‘사건’은 한참 전 일 같기도 했다.
수업을 마치고 홀로 두오모의 향수 가게 들을 둘러보거나 시에스타를 외치는 폰시를 끌고 매일 새로운 베이커리와 약국들을 구경했다. 원체 빵순이에 화장품과 영양제들을 좋아해 새로운 가게만 보면 방방 뛰는 나를 보고 폰시는 신기하다며 귀여운 ‘narco.’ 약쟁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해 질 녘에는 광장에 모여 함께 집으로 향하기도 했고 아예 집에서 모이기도 했다. 밀라노 물가가 높기도 했고, 저녁을 먹지 않는 나와 외식하지 않는 폰시, 엄청나게 많이 먹는 마커스 셋에게 외식은 어울리지 않았고 셋 중 한 명이 술을 사들고 집에 와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마커스의 자작곡들을 들으며 셋이 소파에 기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때의 음악을 아직도 좋아하는데, mrks, nugat의 ‘Hailie’라는 곡으로 실없이 웃던 우리 모습뿐 아니라 기교 없이, 이기적인 마음 없이 순수했던 우리가 그려지는 곡이다.
우리는 새로운 장소에 간다거나 색다른 활동을 한다거나, 심지어는 쇼핑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찌나 재미있던지. 술 한 잔 걸치지 않은 맨 정신으로 거리를 걸으며 박장대소를 터뜨리고는 했다.
하루는 Korean Dinner에 대한 보답으로 마커스가 German Dinner을 차려주었다. 아파트의 모든 플랫 메이트들과 폰시까지 함께 하는 식사자리였다. 그때도 음식의 명칭을 알아듣지 못했고 아직까지도 정확한 명칭을 모르지만 무척이나 맛있는 식사였다.
반죽 안에 볶은 양배추와 마늘, 소시지를 넣어 오븐에 구운 요리로 머스터드소스를 곁들여 먹었는데 새로운 형식이지만 익숙하고 맛있는 맛이었다.
긴 나무 책상에 각기 다른 국적의 다섯 명이 앉아 서로 다른 억양의 영어로 이야기하고 떠들며 우리는 가족이 되어갔다. 단순한 플랫 메이트를 넘어 더욱이 가까워졌고 폰시도 그 일원 중 하나였다.
저녁식사 후 가장 어린 시모네는 일찍 방에 들어갔고, 원칙주의자 토마스도 조금 후 자러 들어갔다. 결국 남은 건 우리 셋과 1유로 화이트 와인, 그리고 ‘el sabor.’
가장 가성비 좋은 칩 중 하나로 멕시코의 나초칩이었지만 그리스 브랜드의 칩이다. 귀국해서 세계 과자 할인점에서 마주했을 때 무척이나 반가워 구입해 혼자 먹어봤는데 그때의 그 맛이 아니었다.
시모네가 들어간 후에야 마커스는 과자 봉지를 개봉하며 그는 하는 것도 없으면서 너무 많이 먹는다고 투덜거렸다.
이날 또한 열심히 마시고 떠들다 토마스는 일찍 들어갔고 셋이 소파에 눕듯이 기대 실없이 웃고 떠들었다. 이날 마커스는 그가 빠져있는 한 여학생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녀는 폴란드에서 온 교환학생으로 마커스에 의하면 ‘시크하고 갖기 어려워 보이는’ 매력을 가진 친구였다. 이때 마커스는 그 아이를 ‘Beautiful’, 아름답다고 표현했고 일반적으로 ‘pretty’ 혹은 ‘cute’을 사용하는 미국 언어문화와 달리 우아하고 존중하는 느낌이 들어 마커스의 그녀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 한참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여자 친구가 있는 마커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며 토로했다.
폰시와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깔깔거리며 웃었다.
형광등이 없어 튼 스탠드 램프 하나가 거실의 흰 벽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독일 음식 디너파티로 우리는 한 층 더 가까워졌고, 우리는 폰시의 스페인 디너를 기약하며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