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a Jan 06. 2022

Via Negroli 2, Milano

고달픈 옥토버페스트, 남녀의 친구 사이

친구들과 자주 어울려 다니다 보니 사람들이 폰시와 나를 연인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아니라고 웃어넘기곤 했는데 문득 폰시가 과하게 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조금씩 폰시를 개인적으로 보는 일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시 폰시는 스페인에 여자 친구가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거리낌 없이 친해질 수 있었는데 하루는 그가 우리 집에서 저녁을 함께 하던 날, 술을 마시다 여자 친구와 싸웠다는 이야기를 했다. 흔한 연인 간의 다툼이겠거니 했는데, 들어보니 그 다툼의 원인이 나일 것 같다는 ‘여자의 촉’이 곤두섰다.


언제나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촉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폰시와의 만남이 더 이상 편하지만은 않았다.



폰시 외에도 지난날 클럽에서 만났던 플로라와 연락하며 지냈다.


플로라는 미술사를 전공하는 학생이었고 옥스퍼드에서 온 친구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날이 아무리 지나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착하고 날카로운 인상에 비해 따듯한 마음씨를 가진 친구였다.

플로라는 홈스테이를 했다. 어느 이탈리아인 할머니 댁에서 지냈는데, 할머니와 피자도 해 먹고, 낮 와인도 마시며 차분하지만 재미있는 시간을 즐겼다.



플로라와 둘이서는 대부분 낮을 함께했다. 여기저기 걸어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대화의 주제는 대부분 그녀의 남자 친구 이야기였다. 사실 대부분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녀의 남자 친구인 정도만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인상을 찌푸리거나 웃는 등의 표정에 집중하며 짐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폰시가 대화의 주제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었는데, 그녀가 보기에도 폰시가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주변에서 이러한 이야기들을 듣다 보니 점점 더 폰시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폰시도 이를 느꼈던 것 같지만 이 관계성에 대해 우리는 금기된 주제인 마냥 서로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폰시는 점점 눈치를 봤고, 나는 마커스 없이 둘이 보는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애매한 관계가 되기 전, 플로라와 폰시와 함께 셋이 교환학생 프로그램 중 옥토버페스트 여행을 신청했었다. 잔뜩 들떠 별생각 없어 보이던 폰시를 설득해 가기로 했었는데, 어느덧 그날이 다가왔다.


마커스는 함께하지 않았고, 폰시의 스페인 친구 몇 명이 함께 했다.

폰시와는 관계가 이미 서먹서먹해지고 (내 입장에서) 마음이 불편했던 상황이라 여행이 달갑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미 결제하기도 했고, 이때 아니면 옥토버페스트를 언제 즐길 수 있을지 모르니 꾸역꾸역 약속 장소로 향했다.

자정이 되어, 하나둘 버스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약속 시간에 제때 출발하지 않았고 30분 후에나 버스에 시동이 걸렸다.


플로라 옆에 찰싹 붙어 그녀에게 눈빛을 보냈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플로라는 내 옆에 앉았고 쭈뼛쭈뼛 거리던 폰시는 스페인 여자 아이와 함께 앉았다.

뮌헨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밀라노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에 도착하는 루트였는데, 세네 시간을 달리던 도중 버스가 멈춰 섰다. 터널을 사이에 둔 고속도로 한가운데에 버스가 정차했는데, 정확히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수 없었다.

산 중턱의 도로에 멈춰 선 버스는 한 시간이 지나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사님과 이벤트 담당자가 이태리어로 대화를 나누는데, 미간의 주름으로 보았을 때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수리센터 차로 보이는 벤 한대가 도착했고 다시 움직일 거라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리센터도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다.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무엇이 문제인지, 얼마나 걸릴 것인지, 심지어는 독일로의 여정이 이루어질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어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좁은 버스 칸에 앉아 있으니 슬슬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플로라와 함께 시원한 스위스 공기라도 마실 겸 잠시 나왔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지만 산으로 둘러싸여 상쾌했다. 이렇게라도 스위스 땅도 밟아보는 거야, 라며 서로를 달랬다.



한참 후, 정차한 지 몇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모두들 오들오들 떨며 덜 깬 피곤한 눈으로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버스가 도착했다.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며 새 출발을 맞이했다.


드디어. 대략 다섯 시간 만에 다시금 뮌헨으로 향했다.


정말 끝도 없는 여정이었다. 어릴 적 미국 미시간 주에서 뉴욕까지 차로 이동했던 때가 떠올랐는데, 그때는 자차에 스타워즈 시리즈가 모두 다운로드된 노트북이라도 있었지 이 버스는 정말이지 좁고 불편하고 건조하고 피곤하고. 멀미가 계속되다 못해 지쳐 좀비로 변해버리는 기분이었다.


오스트리아의 한 휴게소에 잠시 들러 프레즐로 아침을 해결하고 50센트를 지불해 드디어 화장실을 사용했다.

기본적인 배출도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상황의 어이없음을 이때 몸소 느꼈다.

그래도 나름 깨끗해서 용인되는 수준이었다.


또 한참을 달린 후 오후 세시나 돼서야 뮌헨에 도착했다. 드디어! 이 모든 수고를 감당하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축제, 옥토버 페스트에 도착했다!


기대에 부풀어 두근거리는 심장의 움직임이 힘들 정도로 피곤하고 지친 상태였지만, 어떻게 도착한 곳인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억지로라도 환호를 지르며 버스를 빠져나왔다. 정해진 시간까지 버스로 돌아가면 되는 자유로운 일정이었다.


이미 축제 현장은 취기에 젖은 군중들로 가득했고 부스들을 사람들로 가득해 도저히 테이블을 잡을 수 없었으며 길을 걸으며 서로를 놓치지 않기 위해 옷자락이라도 잡고 다녀야 했다.

독일 전통의상부터 기모노, 한복 등 각국의 전통의상들을 입은 사람들이 맥주로 통일되는 모습은 정말 진귀한 현상이었다.


소시지, 사워 크래프트, 핫도그, 감자튀김, 프레즐 등 각종 맥주 안주들이 가득했고 웃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 만취해 싸우는 사람들 등 정신없는 이 축제는 어른들의 놀이동산을 가장 잘 표현한 풍경이었다.


막상 축제 내에서 편히 맥주를 마시지는 못했다. 아니, 맥주는 한잔도 즐기지 못하고 프레즐과 소시지 하나를 먹은 게 다 였다. (이날 이후로 프레즐에 대한 환상은 사라졌다.)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폰시와 서먹서먹했던 사이도 잊고 플로라와 폰시 그리고 다른 스페인 학생 몇과 함께 사람 미로를 헤쳐나갔다.


이곳에서 만큼 대놓고 인종차별을 당한 곳도 없었다. 보자마자 눈을 찢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 니하오, 곤니치와를 소리치는 사람들. 사실 다 그러려니 했고 별로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취기에 더 심해지나 보다 하고 넘길 만했는데, 길을 가던 중 독일 전통복장을 입은 한 남자가 쪽쪽거리는 행위를 하며 내 엉덩이를 주무르고 지나갈 때는 참지 못했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멈춰 서서 상황을 소화하려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분노가 치밀어 뒤를 돌아보며 소리 지르려 하는데 낄낄거리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리고 남자는 인파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기웃거리는 나를 폰시가 붙잡아 무리 속에서 끌어냈다.

상황을 설명하자 함께 화내며 뒤를 돌아봐주는 폰시가 고맙고 미안했다. 조심하라며 사람들 사이에 있을 동안은 옆에 붙어 있어 주었고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플로라 폰시 나 그리고 몇 명과 함께 축제 현장을 벗어났다.

사실 즐기려면 충분히 즐길 수 있었고 취기에 젖은 사람들과 친구를 맺고 합석하면 되기도 했는데, 시끄러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어서 시도도 해보지 않고 지나쳤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코로나가 터질 줄 알았다면, 한 번쯤 comfort zone에서 벗어나 행동해봤어도 좋았을 것 같다.



각자 의견이 갈려 플로라와 나, 폰시와 나머지 일행으로 갈라져 이동하기로 했다.

플로라와는 마을을 구경했고 마침내 축제 근처 조용한 맥주집에 앉아 맥주 한 모금을 했다. 뮌헨은 비주얼적으로 그리 기억에 남는 도시는 아니었다. 그저 축제로 인한 엄청난 인파가 기억날 뿐이다.


슬슬 해가 저물었고 축제 채팅방에 뮌헨 투어 할 사람들!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할 것 없던 우리는 그리로 향했고 가보니 폰시도 와있었다.

강한 햇살로 더웠던 낮과는 달리 밤이 되니 무척이나 쌀쌀했다. 게다가 조금 먹은 맥주로 몸이 더 차가워진 것 같았다. 많지 않은 인원이었지만 설명은 전혀 듣지 않고 놓치지 않을 정도의 맨 끝 거리에서 졸졸 따라다니며 플로라와 수다를 떨었다. 관심이 없던 것도 있지만, 옆에서 눈치를 보는 폰시가 불편했다.

플로라에게 이런 사실을 폰시가 말했던 건지, 플로라는 서로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불편한 상황과 대화를 극도로 싫어하고 피하는 것에 익숙한 나로서는 썩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폰시가 결국 다가왔다.


‘지호야’


‘으응? 응 폰시!’


최대한 모른척하며 밝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제발 제발 말하지 말아 줘’를 외치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질문으로 운을 뗀 폰시는 부드럽게 나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보통 때라면 얼버무리고 상황을 무마시키려 아무 말이나 하며 둘러댔을 나였지만 왠지 모르게 폰시의 말투, 표정, 행동에 마음이 움직인 건지 솔직한 마음이 쏟아져 나왔다.


‘사실 네가 불편해.’


그간의 몇 가지 상황들을 이야기하며 나는 진심으로 너와 친구가 하고 싶었다 라는 마음을 전달했고 고맙게도 폰시는 나의 말을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랬구나. 지호, 나는 너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너랑 있으면 정말 즐거운데. 친구는 어때?’


본인이 느낀 바와 생각들로 답변했지만 폰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았다.

신기한 대화였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 각자 다른 입장을 인정하는 태도. 당연한 것 같지만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폰시의 말만으로 마음을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분명 나도 폰시가 좋았고, 함께 있으면 즐거웠고 잘 맞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 폰시! 우리 친구? 친구 하자 친구.’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라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하며 강조하여 언급했고 각자 미소를 지으며 대화가 종료되었다.


힘들게 도착한 뮌헨, 제대로 즐기지 못한 피곤함으로 가득했던 축제에 추운 저녁 공기 속에서 응어리졌던 마음이 녹아내렸다. 대화를 마무리지으며 며칠 만에 폰시의 눈을 마주했다. 폰시의 눈이 촉촉하게 반짝였다.


대화를 마칠 무렵 투어도 마무리되었다. 함께한 학생들 중 많은 인원이 끝없는 대기로 맥주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리더는 우리를 어느 술집으로 데리고 갔다.


⁨Hofbräuhaus Brewery⁩, ⁨Munich⁩, ⁨Bavaria⁩, ⁨Germany⁩

호그와트 강당, 학생들이 앉아 식사하던 공간처럼 뻥 뚫린 공간의 끝에 무대가 있었고, 그 외에는 기나긴 테이블들이 행을 이루었다. 추위 혹은 취기로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들이 서로를 마주하며 웃고 떠들며 자신의 얼굴은 충분히 담을 것 같은 크기의 잔 속 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밤 아홉 시 사십 분이었지만, 발을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이 공간도 메워져 있었다.

다행히도 한 테이블이 비워져 자리를 잡았고 웨이트리스는 거대한 맥주잔을 한잔당 5킬로는 족히 넘어 보이는 가득 찬 맥주잔 여덟 개를 양손에 드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이곳의 웨이트리스들은 우리나라 헬스장에서 큰소리 내며 헬스 하는 사람들은 거뜬히 이길 수 있는 진짜 근육의 소유자들이었다.


폰시와는 대화를 나누었지만 아직 그 어색한 분위기가 완전히 풀린 상태는 아니어서 따로 앉았고 플로라와 한 명의 친구와 셋이 맥주를 나눠 마셨다.


무대에서는 독일 전통 음악 연주가 있었고 사람들은 이에 맞춰 ‘헤이! 호우!’ 등의 추임새를 넣으며 하나가 되었다.

깔깔깔 웃으며 옆자리에 앉은 독일인들과도 건배를 했고, 그들은 독일 안주라며 그들에게 나온 안주를 넘겨주었다.


북적북적, 회식이나 엠티 보다 정신없는 자리였지만 나름 즐거운 경험이었다.


가게를 나설 때쯤에는 정말 몸만 살아 움직이는 좀비 상태였다.




옥토버페스트는 사실, 정말 힘든 고난의 여정이었다는 기억 밖에는 없다. 하지만 이 날이 없었다면 폰시와의 사이가 어떻게 되었을지, 나의 밀라노가 어떠한 방향으로 틀어졌을지 모르겠다.


버스로 돌아가는 길에서 볼 수 있던 축제의 밤은 매우 매우 더러웠다. 만취해 휘청거리는 사람, 길바닥에 누운 사람, 소리 지르는 사람들은 기본이고 땅바닥에는 토와 오줌이 즐비했으며, 길목 길목에는 전혀 로맨틱해 보이지 않는 키스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버스에 탑승해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축제를 열심히 즐기고 온 스페인 무리들은 (인종차별이 아니라 정말 모두 스페인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투어 인원의 대부분이 스페인 학생들이었다.) 만취해 소리를 질렀고 핸드폰으로 포르노를 보는 학생들, 그게 웃기다며 신음 소리를 내며 낄낄거리는 학생들 등등 그 저급함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최악은, 한 학생이 (이 사람도 스페인인이었다) 하차 계단에 토를 한 것이다. 정말 너무 역겨웠다. 이날로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편견이 지독하게 생겨났다. 이제는 모두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지만, 경험에 의한 어느 정도의 인식이니, 나무라지 않기 바란다.


나중에 들어보니 폰시 또한 만만찮게 힘들었던 것 같다. 보살에 가까운 폰시였지만 돌아가는 길에 앉은 여자아이의 끝없는 연애 상담과 남자 이야기에 지쳐 자는 척 연기를 했다고 한다. 돌아가는 길 또한 적어도 9시간은 걸렸던 것 같다.


이렇게, 취기 없는, 토로 가득한, 고달픈 옥토버페스트가 끝이 났다.




작가의 이전글 Via Negroli 2, Milano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