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gela Jan 04. 2022

Via Negroli 2, Milano

Korean Thanksgiving; 추석 디너파티

며칠 후 학기가 시작되었다. 세 과목을 신청했는데 그중 한 가지 수업이 폰시와 겹쳤다.

미국인 교수가 진행하는 수업이었는데 유럽 전반에 걸친 사회 역사 수업이었다. 교수를 보며 학생들은 모두 매우 미국인 (very american)이라고 불렀는데 이유인즉슨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던졌고 적극적인 학생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많은 수업들은 특히 대강의 들은 한국 강의와 같이 학생들의 참여율이 저조하고 교수 위주로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심지어 이 수업 외에는 출석이 필수적이지 않기 때문에 50명 혹은 100명 정원의 강의임에도 불구하고 10명가량의 학생들이 출석하는 경우가 잦았다.


들었던 세 과목 중 가장 어렵고 공부해야 할 것도 많았지만 좋았던 강의는 신기하게도 매우 미국인 교수의 강의였다. 그의 에너지와 강의 주제에 대한 열정 그리고 학생들의 참여율 때문인지는 몰라도 집중해서 듣고 집에서 개인 공부도 열심히 했다. 어쩌면 폰시와 함께 듣는 수업이어서 더 그랬을 수 있다. 그렇게 폰시와는 더더욱 정기적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외의 과목 중에서는 이탈리아인 남학생 두 명과 조금 가까워졌다. 한 명은 금발의 자유로워보이는, 서핑을 즐기는, 영어가 능숙한 친구였고 다른 친구는 영어가 무척이나 서투르지만 순수한 눈빛과 아이 같은 웃음을 가진 친구였다. 시간이 지나 그들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얼굴과 분위기만큼은 기억에 남는다.


어찌 친해진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수업을 나오는 몇 안 되는 학생들 중에서도 홀로 강의에 온 학생들이어서 접근 장벽이 낮았던 것 같다.

그래도 이탈리아에 와서 현지인과 알고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그냥 왠지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다.


금발의 친구는 처음 서로 종이를 건네받고 먼저 미소를 보내주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다. 그러다 강의 도중 물어볼 것이 생겨 먼저 내가 먼저 다가갔던 것 같다. 여느 이태리인들과는 달리 (주관적 견해이며 솔직하게 느낀 바다) 억양 하나 없이 영어를 능숙하게 해 크게 놀라며 “너 혹시 미국인이야?”라고 물어보았다. 그는 웃으며 “아니, 근데 오스트레일리아에 잠시 살았었어 하하하”라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렇게 서로의 나쁘지 않은(?) 영어 발음을 계기로 대화의 싹이 텄다.


몇 번의 대화 후 점심을 함께하고 수업에 같이 가기로 했다. 덕분에 대학가 앞의 카페테리아 같은 식당, 이태리 학생들만 있는 그러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태리에만 있는 맛이라며 추천한 ‘san pellegrino’의 chino맛을 마셨는데, 제주도의 감귤 에이드와 같은 개념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오렌지 과의 열매로 상큼 씁쓸 달달한 매력이 있는 음료다. (사실 엄청 기억에 남을 정도는 아니지만 현지인이 추천해줘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이렇게 폰시와 마커스 외에도 다양한 친구들을 만들려 노력하고 교환학생 행사가 있으면 최대한 참여하려 했다.


개강 후 그 주쯤이었던 것 같다. 교환학생 오리엔테이션이 있었고, 이런저런 설명 이후 밀라노 도심을 둘러보고 신청한 학생들에 한해 ‘apperitivo’를 즐기는 일정이었다.

밀라노에서 무조건 가봐야 한다는 아페리티보는 저녁식사 전 술을 마시는 문화인데 일정 금액을 내고

(술값) 원하는 안주를 마실 수 있는 뷔페와 비슷한 형식이다. 대학생의 경우 비싼 저녁 대신 이러한 곳에서 저녁을 대신한다고도 한다.

고급스럽다거나 화려한 곳은 아니었지만 진토닉 한잔에 원하는 음식을 담아와 친구들과 떠들었는데, 음식 맛은 최고였다. 파스타, 샐러드, 치즈, 살라미 등등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고 여섯 시부터 시작되는 아페리티보는 여덟 시나 되어야 먹을 수 있는 밀라노의 저녁보다 한국인인 나에게 적격이었다.


이렇게 크고 작은 행사들에는 항상 폰시가 옆에 있었다. 벌써부터 단짝이, 그것도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이태리에서 어디를 다녀도 소통이 가능한 친구가 생겼다는 기쁨과 안정감이 생겼고, 더 이상 밀라노는 어색하거나 무서운, 홀로 지내며 매일매일을 긴장감에 살아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학교도 나름 열심히 다니고, 도시를 열심히 누비며 밀라노를 일상에 흡수하기 시작했다.



개강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추석이 되었다.

부모님과 영상통화를 하다 문득 옹기종기 모여 저녁을 함께하던 시간이 그리워졌다. 강의를 마치고 폰시와 이야기를 나누다 추석 디너파티를 하기로 했다.


추석 음식이 정확히 뭔지 기억나진 않았지만 서양인도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한국식 파스타인 잡채와 제육볶음을 만들기로 했다.

재료들을 구하기 위해 코리안 마트를 찾았는데 학교에서는 1시간, 집에서는 한 시간 반이 걸리는 거리로 밀라노 북부 외곽에 위치한 곳이었다.


머나먼 여정이었지만 폰시와 함께였고 또 오랜만에 한국 음식들을 볼 수 있다는 생각과 그것을 소개해줄 수 있다는 마음에 들뜨고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 초등학생 고학년 시절 가족들과 미시간주의 앤아버라는 작은 대학 마을에 살았는데, 당시에 자주 가던 ‘만나 마트’가 떠올랐다. 세련되거나 깔끔하진 않았지만 크지 않은 공간에 있을 건 다 있는, 고향의 맛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공간이었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보았던 단무지가 기억에 남는다.


마트는 허름했지만 놀이동산에 간 아이 마냥 싱글벙글 웃으며 폰시에게 다양한 양념과 과자 냉동식품들을 보여줬다. 하지만 곧 가격표를 보고는 웃음이 울음으로 변했다.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소개해주고 싶은 마음이 굶뚝 같아 이것저것 담았다. 당면과 간장, 제육볶음 양념, 막걸리, 소주, 그리고 대표 과자 안주인 새우깡을 담아 나왔다.


폰시는 호탕하게 웃으며 이거를 다 만들겠다는 나를 어린아이처럼 바라보았다.


“여기에 소주 마시잖아? 크으으으”

“하하하ㅏ핳 지호 너 정말 웃겨.”


집 근처로 와 심플리 마트에서 고기와 갖은 채소들을 사 왔다. 아직 집은 비어있었고 다들 저녁시간에 맞춰올 예정이었다.


본격적으로 요리에 들어갔다. 신발을 신고 비좁은 주방에서 요리하는 건 정말 불편하지만 색다른 경험이었다. 고기 양념과 기름 음식물 찌꺼기가 사방으로 튀었고 폰시는 정리 담당이었다.


한창 음식을 만들던 중 마커스가 왔다. 딱히 할 것이 없는 폰시에게 마커스와 시간을 보내라고 하고 음식을 마무리했다.


“Happy Korean Thanksgiving!! Chin chin!”


요리가 두 종류여서 반찬으로 가득 메워진 한식 한상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소주와 막걸리가 든든하게 빈자리를 메꿔주었다.


갓 들어온 시모네도 합류했다.


아파트 거실에, 식탁에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이게 뭐야? 파스타 같아!”


후루룩 쩝쩝 포크로 먹은 한식이었지만, 매우 초라한 한상이었지만, 내가 만든 요리였지만 무척이나 맛있었다.




소주도 친구들에게는 놀라운 술이었다. 와인, 맥주 외에는 보드카를 마시는 친구들에게 소주는 무척이나 부드럽고 달달한 술이었다.

막걸리는 주스 같은 느낌이었다.


꽤나 많은 양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그릇들이 비워졌고 술도 턱없이 부족했다.

조금의 취기가 오른 네 명이서 집 앞 마트로 향했다.


감자칩과 와인, 보드카를 담았던 것 같다. 논리적 사고를 하는 마커스와 시모네가 함께 마트를 돌았고 방방 뛰어다니는 나와 그 뒤를 쫓아오는 폰시는 치즈 가판대와 과자 진열대를 배회했다.


행복했다. 계산대에 이것저것 올려놓으니 욕심부리지 말라며 몇 가지를 돌려놓게 만든 마커스와 달래주는 폰시. 친구들이 듣건 말건 음식에 대한 설명을 끊임없이 하는 시모네.

가족도 아닌 마냥 친구도 아닌 그 중간의 애매한, 따듯한 이 감정이 너무나도 소중했고 마음이 꽉 찬 기분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인상 깊을 추석이었다.


실컷 마시고 떠들다 막내 시모네는 먼저 자러 들어갔고, 마커스는 시모네가 많이 먹는다며 불평하기 시작했고, 폰시와 나는 그 귀여운 투정에 웃었다. 셋은 소파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만취 전에 여기저기 다니며 요리한 탓에 피곤이 먼저 찾아왔고 시간이 가늠 가지 않는 새벽 시간에 방에 들어갔다.

(라고 기억을 미화해왔는데, 며칠 전 /2021년/ 폰시와 통화하며 나 또한 이날 만취할 때까지 함께 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폰시가 본 만취 지호가 3번 정도 있었는데 그중 한 번이자 처음이라고 했다.)


추석, 폰시는 처음 우리 집 거실 소파에서 밤을 보냈다.



다음날, 강의를 들으러 일찍 일어났고 폰시는 소파에 곤히 잠들어있었다.


“폰시, 다녀올게. 이따 보자.”


숙취에 절어 인상을 찌푸린 채 실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폰시에게 속삭이고는 조용히 집을 나왔다.


나중에 폰시는 이날을 언급하며 지호는 ‘정말 부지런한 아시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시정해주었다. ‘한국인’이라고. 술을 얼마나 마시던 강의는 결석도 지각도 하지 않는 ‘코리안’의 위대함을 본받으라며..


하루가 어떻게 지나간 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없이 강의를 마쳤던 것 같다.

소주, 막걸리, 보드카, 샴페인을 합쳐 마신 탓에 마커스와 폰시는 최악의 숙취를 경험했다고 한다.

그에 반해 멀쩡했던 나를 보면 한국 청춘들의 간의 위력은 세계적으로 견주어보았을 때 상위권을 당당히 차지하는 게 확실하다.






띠링,


강의를 듣던 도중 폰시에게 한 장의 사진이 왔다.

거실 전경이었다. 누가 봐도 숙취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피식- 웃고는 ‘이따 봐.’라고 보냈다.

작가의 이전글 Via Negroli 2, Milan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